특집2. 직업병 집단 조사(혹은 역학조사), 제대로 하기 위한 과제들 / 2020.01

[산재예방을 위한 조사활동이란 무엇인가②]

 

 

 

직업병 집단 조사(혹은 역학조사), 제대로 하기 위한 과제들 

 

 

 

김형렬 / 노동시간센터 

 

 

 

반도체 직업병, 집배원 과로사 이슈는 최근 2~3년 내에 역학조사 혹은 실태조사가 진행 또는 발표되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 뿐 아니라 30여 년 전 원진레이온 사건, 10여 년 전 반도체 백혈병 이슈와 함께 우리 사회의 중심 사건이었던 한국타이어 노동자 집단 질병 발병 조사도 있었다.

직업병 조사 활동(혹은 역학조사)은 문제제기 단계에서 시작한다. 문제제기는 피해를 입은 노동자 혹은 유족들에 의해 시작되고 여러 사회단체에 의해 조사 필요성이 제기되는 단계를 밟는다.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례를 국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고,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직업병 집단 조사의 시작, 문제제기 단계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안이 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조사가 진행되려면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수이거나 (위험의 크기), 그 문제가 매우 심각한 문제이거나 (심각성), 사회에서 주목 받고 있는 사안이거나 (공적관심), 예방의 지점이 명확히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사안인지 등을 확인하게 된다.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려면 이를 수행할 전문가, 예산, 자료에 대한 접근 권한, 조사 대상자들에 대한 동의 획득 등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사 결과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는 기업의 수동적인 태도는 문제제기를 넘어 본격적인 조사 수행을 어렵게 하는 이유다.

이 단계에서 짚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 기업 혹은 국가기관의 자발적인 문제제기와 이를 근거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업은 구성원들의 건강변화와 결과에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곳이지만, 질병 발생의 원인을 추적하는데 소극적이다. 1년에 10만 건에 육박하는 산재 신청 자료를 가지고 있고, 200만 명에 가까운 특수건강진단 자료를 가지고 있는 국가기관에서 논란이 되는 질병에 대해 선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흔하게 있는 사례는 아니다.

둘째, 문제제기를 수용하고 평가하여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힘은 전적으로 "요구하는 힘"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의 긴 투쟁과 요구, 노동조합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구하지 않으면, 투쟁하지 않으면 본격적인 조사 단계에 이르지도 못하고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격적인 조사, '누가'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

기나긴 투쟁을 통해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게 되도 조사를 수행하는 전문가를 선정하는 작업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기업과 노동계 혹은 피해자 단체에서 추천하는 전문가가 다른 경우가 많아, 서로 추천하는 전문가가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안전보건공단과 같은 국가기관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때도 자문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힘이 존재할 수 있다. 조사 범위를 둘러싼 논쟁도 뜨겁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 인력 등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든 내용,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중복된 조사는 피하고, 기존 자료를 활용하는 등, 빠른 시간 내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의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사 범위를 정하고, 필요하면 조사 이후 단계에서 진행해야 할 주제를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

조사 주체를 정하고, 조사 범위를 정하는 작업을 수행하느라 개입이 필요한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몇 달이면 기본적인 조사를 끝내고 대안 논의를 해야 할 시점인데도 아직 조사 범위와 방법을 둘러싼 논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역학조사와 집단조사의 전문가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이거나 합의가 가능한 내용임에도 전문가들의 불필요한 고집, 의도적 지연 등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사 전문가가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현실에선 추천되는 전문가가 회사 측과 노동계에서 다른 경우가 많다. 조사된 결과를 숨기거나 결과를 조작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조사 작업의 결과는 열심히 찾아서 보려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논쟁하되 빠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사를 이끄는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조사 과정에 '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다. 공식적인 회의 참여를 통해 조사범위와 내용을 정하는 과정까지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가 많은 조사결과, 결국 해석의 문제

기나긴 시간을 거쳐 조사 결과가 발표되지만, 원인과 해결방안이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제기되는 문제들은 중독과 같은 전통적인 직업병과 달리, 일반인구 집단에서도 비교적 흔하게 발생하는 암, 심장질환, 정신질환 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직업적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오히려 비직업적인 원인 또한 드러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조사과정에서 우리가 직업병이라 주장하는 근거만큼이나 직업병이 아니라는 근거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직업병은 이미 100% 직업적인 원인에 의해 발병하는 것보다는 ①직업적 원인이 일정한 기여를 하거나, ②직업적인 요인이 일반적인 위험 요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서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거나, ③일반적인 요인과 직업적인 요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해당 질병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직업적 원인을 희석시키고 업무관련의 불확실성을 키움으로써 산업재해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자본과 기업의 전략이 손쉽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조사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매우 중요해 진다. 통계적 방법을 통해 도출된 양적인 결과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직업병이라는 복잡다단한 현상을 설명해 내기 어렵다. 산업변화에 따라 직업병의 종류도 더욱 다양해지고, 직업병의 발병 양상도 복잡다단해졌다. 각 상황마다 위험 물질 노출 양상이 균질적이지 않으며, 여러 위험요인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이뤄진다. 과연 전통적인 역학연구 방법론만으로 이러한 현상을 제대로 분석해낼 수 있을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질적 방법론을 적극 조사과정에 반영하고, 당사자들의 상황과 업무 그리고 발병까지의 맥락을 이해하는 섬세한 해석과 예방과 연계된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예방을 위한 대책 마련하기

원인을 명확히 밝힐 수 있다면, 적합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그러한 대책은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의 크기만을 확인하고 원인을 찾지 못했거나, 유력한 원인을 확인했지만 경쟁하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여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조사가 정말 예방을 위한 것이라면, 관점이나 방향이 없는 조사결과 발표가 되지 않아야 한다. '명확한' 원인이 아니더라도 '유력한' 원인이 밝혀질 수 있다.

이러한 유력한 원인들이 드러났다면, 예방을 위해 보편적인 조치를 활용할 수 있다. 해당 요인들을 제거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예방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직접적이거나 명확한 원인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않거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조사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며, 형식적인 조사문건 하나를 더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이렇게 조사결과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 추가조사를 여러 방향에서 제안하고 실행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조사를 통해 제안된 권고 내용은 잘 지켜지고 있나?

수백,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는 꼼꼼한 결과와 해석, 권고안이 담겨져 있다. 그동안 수행했던 역학조사와 직업병 실태 조사 보고서는 조사자들의 노력과 피해자들의 피땀이 실린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보고서에 담긴 수많은 권고안들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모든 조사 보고서에는 권고안이 제대로 지켜지는 지 점검하고, 상황 변화가 발생할 경우, 수정된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할 이행점검단이 제안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조사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단계를 예비하기 위함이다. 조사는 끝이 아니라 예방을 위한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