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2) / 2018.05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2)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최진일 조합원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황재민씨 산재 인정 투쟁에 돌입

"황재민씨 산재는 뇌·심혈관계 질환이다 보니 워낙 복잡한 문제여서 이것저것 확인할 자료가 많이 필요했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다는 자료에 대해서도 반박할 근거를 만드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내용적인 준비를 마치고 근로복지공단에 갈 때도 이미 불승인한 사건을 재심사해달라고 요청하는 초유의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다. 동료들도 마음이 통했는지 사전에 무슨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끝장을 보고 갈 마음으로 왔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생각보다 쉽게 재심사를 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회사가 자료를 거짓으로 제출한 점, 노동조합이 대응해서 싸우고 있는 점, 공단 내 여러 복잡한 문제로 잡음을 만들면 안 되는 상황으로 인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운이 좋다면 좋았다. 다시 산재를 신청하면서 현장 재해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근로복지공단과는 이야기가 풀리는 데 문제는 회사를 설득하는 거였다. 회사는 현장 조사를 하면 노조에서 누가 참여할 거냐, 민주노총 조합원은 때려죽여도 참여시킬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논의해서 노조 추천으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훈구 활동가가 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정해서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처음으로 현장 조사를 나오다 보니 회사는 물론 동료 노동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컸다.

"동료가 일하다 다쳤는데 산재를 신청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재해 조사를 나오고 산재 인정까지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처음인지라 현장 이슈가 됐었다. 이후 투쟁 끝에 결국 황재민씨는 산재를 인정받았다.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무엇보다 황재민씨가 장해가 계속 남을 건데 그나마 산재를 인정받아서 앞으로 남은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장 보상을 얼마 받았느냐보다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었다."

산재인정 투쟁 이후 조금씩 변화하는 현장

"동료들이 산재인정 투쟁 전체를 지켜봤기 때문에 현장에 민주노조가 있다는 게 알려졌고, 저 친구들이 몇 안 되지만 제대로 활동한다는 인지도가 생겼다. 그리고 현장 노동조건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체조를 근무시간 15분 전에 의무적으로 했는데, 현장조사가 시작될 즈음 체조를 자율적으로 바꿨다. 설비도 변화가 있었는데 자동차 테일게이트(뒤 뚜껑)과 후드(앞뚜껑)를 이송하는 리프트를 설치했다. 설치한 지 1년 정도 됐는데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도 있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은 황재민씨 산재 인정 이후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지속해서 이어나갔다.

"노동강도가 워낙 높으니까 현장에서 근골 환자를 찾는 캠페인, 잠깐 쉬는 시간에 앉을 수 있는 의자놓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현장엔 의자랄 게 없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박스를 깔고 앉았었다. 그래서 노동부에 진정하고 현장조사 하면서 현장을 휘젓고 다니니까 회사에서 의자를 주더라. 조금의 변화는 만들었는데 제일 문제인 노동강도 자체를 낮추는 것까지는 아직 못 가고 있다."

지역 활동을 고민하게 한 '행복한 서산을 꿈꾸는 노동자 모임', 행서모

"조합원이 소수다 보니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막연한 게 사실이었다. 사실 동희오토에 있는 활동가들은 지역에서 하는 역할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사람들인데 현장에서 소수노조라는 이유로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는 게 뭐랄까, 되게 아까웠다. 동희오토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안 되고 힘든 건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전체 비정규직 운동, 전체 노동조합 운동이 침체되는 거랑 분리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건 지역 운동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해보자 하는 고민을 하다가 행서모 활동을 고민하게 되었다."

행서모는 몇 달씩 지역 운동에 대한 토론과 의제별 소모임 등을 진행했고, 박근혜 퇴진투쟁과 세월호 3주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원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기획들이 제출되었고 그중의 하나가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되기'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에서 안전보건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모였다.



"한 차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여기 모였던 사람들이 '노안활동가모임'를 구성해서 지금 두 번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문제 외에도 3.8 여성의 날 행사나 청소년 대상으로 헌법을 강의하거나 지역에 산업폐기물매립장, 소각장 등이 들어오는 문제가 있어서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같이 대응하고 있다. 또 지역에서 '새움터'라는 노동안전센터를 만들었는데 그 활동에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4주기 추모행사는 '안전사회를 위한 실천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안전과 생명에 관한 의제를 다루는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준비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제가 상근자처럼 활동하고 있어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는 요즘

"개인적으로는 지금 운동의 문제, 위기를 편하게 얘기해보자면 여러 '경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활동가와 대중,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 그렇다면 이런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지역 운동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고, 조직 자체도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행서모는 대표자나 집행국을 두지 않고 여러 팀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개인들 차원에서는 수평적인 연대와 협력을 지향한다. 그런 지향에 맞게 모임을 운영할 생각이다."

최진일 조합원은 충분히 능력과 의지가 있지만, 기존의 노동조합 체계에서는 활동을 펼치기 막막했던 사람들이 지역에서 능력을 펼치는 것을 보면 즐겁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 동희오토에서 현장활동에 공백이 생기는 건 아닌지 물었다.

"동희오토와 지역 활동, 이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솔직히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다. 동희오토는 노동조합 회의도 있고 하니까 논의를 하는데 사실 지금은 답이 안 나온다. 당장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고 주간 연속 2교대와 같이 현장에 쟁점이 있을 때 노동조합에 입장을 내고 선전하는 활동을 하게 될 것 같다."

지역과 현장을 꼭 나눠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지역에서 활동이 활발할수록 현장에서의 활동 시간과 고민이 부족한 문제는 계속 고민이 될것 같아 이점에 관해서 물었다.

"동희오토를 보면 현장 노동자들이 사측에 압도적으로 장악 돼 있다. 그러니 조합원을 조직하고 활동가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다. 아예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민주노조가 있다가 깨진 사업장이라 더 어려운 것도 같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활동가들이 자기랑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거 그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행서모는 굉장한 모순덩어리인 곳인데. 활동 목표나 방식은 활동가와 대중의 경계를 넘어서고,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한다. 그런데 실제로 행서모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피로와 스트레스를 견디며 활동을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좀 더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대중→조합원→간부→활동가→혁명가 이런 단계와 경계를 두는데 사람들은 무조건 단계적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결국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텐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지금까지 활동의 끝은 조직을 만드는 거였다. 그런데 조직을 만들고 나니까 결국엔 여기도 저기도 조직만 다를 뿐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러면 그 조직은 활동력도 힘도 없다. 지금은 우리가 3.8 여성의 날 집회를 한다고 하면 어떤 내용을 준비해서 어떻게 그 운동을 발전시킬 건지가 중요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다. 그런데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면 열심히 뭔가를 했으니 그걸 계기로 모임이나 단체를 만드는 걸로 귀결되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 행서모는 조직을 만드는 데 관심을 크게 두지 않을 거다. 기존에 운동 관행과 질서와 다르게 의제와 가치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면서 틀과 형식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이 기존에 틀을 벗어나서 다른 활동을 고민해보거나 기획해보는 것 자체가 너무 없는 것 같아 이런 고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꿈과 목표는

"사실 동희오토 들어갔을 때 즈음 너무 나대지 말고 그냥 내 주변 사람들만 지키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아서 활동에 있어서나 개인적으로 꿈, 목표 그런 건 없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넘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사회적 자아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개인적 자아가 부딪히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서산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갈 것인지 물었다.

"지금 같이 활동하는 분들과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 비슷한 연배인 활동가들이 땅을 사서 같이 노후 대비를 한다는 얘기도 있더라. 이제 저도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나이인가 싶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렸다.

"행서모가 만들어질 때 종종 하던 이야기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운동이 이 만큼 망했다 그럼 우리가 잘못해서 망한 거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가 밥 먹듯 하는 활동이 잘못된 걸 수도 있다는 의심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고 해왔던 방식에 대해 의심해봐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아차 하면 어떤 문제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돌이켜보면 잘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앞으로 이런 고민을 같이 나누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1)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최진일 조합원 인터뷰 / 2018.04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터>는 지난 2010년부터 3년여간 [노안활동가에게 듣는다] 코너를 통해 전국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개인적인 고민과 꿈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지금 그때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지, 새롭게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펼치고 있는 동지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다시 시작하는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는 충남 서산에 있는 동희오토에서 자동차를 만들면서 지역에서 행복한서산을꿈꾸는노동자모임(행서모)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최진일 조합원를 시작으로 연재를시작한다.

높은 노동강도를 견디며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전화나 문자로는 몇 번 이야기 나눴는데 이렇게 뵌건 처음이다.

최진일 조합원은 전날 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민주노총 서태안 위원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터에서,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 만나 다양한 고민과 활동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잘 부탁드린다. 우선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부탁드린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동희오토에서 일하고 있다. 동희오토는 2006년 입사해서 일하다 2008년 해고되고 현대차 본사 앞에서 투쟁하면서 2011년 말에 다시 복직했다."

최진일 조합원은 함께 해고 된 8명의 동료들과 복직 투쟁을 했다.

"회사에서 법적인 해고 사유를 '이력서 허위 기재'라고 했는데, 그거야 회사 주장이고 현장에 투쟁이 있었다. 그때가 피치업이라고 회사가 노동강도를 높이려는 상황이었다. 당시엔 한국노총 조합원이었는데 대의원들 중심으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대응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회사에 난리가 났다. 제가 있던 업체는 폐업하면서 저를 포함한 동료들이 해고됐다. 이후에 민주노총에 가입해서 쭉 복직 투쟁을 했다."

당시 투쟁은 노동강도 저지 투쟁이었지만, 사실상 노조 민주화에 대한 투쟁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는 아주 완강히 저항했다.

"동료들이 투쟁하기 이전에 동희오토에서 민주노조 투쟁을 시작한 게 2004년부터였다. 그때는 조합원도 300∼400명 정도 됐는데 그때도 노조 활동을 하려고 하면 조합원 소속 업체가 폐업되고 다시 업체가 들어오고 그런 게 반복되면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미 민주노조 투쟁이 쉽지 않은 현장인데 여기에서 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때만 해도 동희오토처럼 완성차가 아닌 수십 개의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가 완성차를 만드는 현장이 여기 말고 없었다. 그래서 동희오토는 자본에는 꿈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동희오토라는 현장이 비정규직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감자여서 여기를 왔는데, 와보니까 활동가들이 곳곳에 있었다. (웃음) 입사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회사가 나를 뒷조사하고 해고까지 됐다."

현장에서 소소하지만 소중했던 시간들

언제부터 이른바 현장에 투신해서 운동해야겠다 생각했는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선배들은 등록금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수석 선배라고 시위 중에 돌아가셔서, 입학하자마자 열사 투쟁을 했고 그게 제일 큰 계기였다. 사실 동기들이나 선배들한테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대학에 갔을 때 운동권이 많이 있었으면 나는 안 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만 활동하다 보니 절실했던 게 있었던 것 같다."

노동강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 일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동희오토 가기 전에 이미 제조업 사업장에서 일은 해봤는데 컨베이어 노동은 여기가 처음인 데다 여기는 워낙 노동강도 자체가 높으니까 힘들었다. 게다가 노동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입사했을 때만 해도 UPH라고 한 시간에 자동차가 나오는 속도가 32대였는데 지금은 60대가 나온다. 속도는 2배가 빨라졌는데 당연히 인원이 두 배가 늘지는 않았으니 힘들다. 교대하고 야간에 일하는 것도 처음 입사했을 때는 30대라 버텼는데 이제는 슬슬 힘들어진다."

최진일 조합원은 강도가 높은 일을 하면서도 소소한 활동들을 펼쳐왔다.

"처음엔 제가 일하던 업체 안에서만 알음알음 활동을 했다. 4∼5명이 소소하게 회사의 속셈을 알아야 한다고 (웃음) 속셈학원 모임을 만들고 활동했다. 얼마 하지는 못했는데 그러다 처음 집단행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여성 노동자분이 신입 사원으로 들어왔는데 한 분이 야간에 일 적응을 못 해서 반장이 엄청 갈궜다. 면담 들어가면 울면서 나오고 그래서 마침 저랑 같은 조원이라 쉬는 시간에 조원들이랑 의논을 했고, 한국노총 위원장한테 이야기해서 해결해달라고 하자고 결정해서 10명 정도가 찾아갔다. 그때 한국노총 위원장이 안타깝다고 알겠으니 회사에 이야기하겠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퇴근했는데, 다음날 현장을 가보니 업체 사장이 노발대발 난리를 쳤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문제 해결은 커녕 업체 사장한테 우리가 한 이야기를 고자질했다. 그 뒤로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한국노총이 누구를 위한 노동조합인지 분명이 알게 됐다."

온갖 멸시와 왕따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활동

이른바 현장 활동 주범으로 찍힌 최진일 조합원은 복직 이후에도 지금까지 현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단속을 받고 있다.

"동료들이랑 같이 해고됐을 때 아예 민주노총 조합원은 없었고 현장이 한국노총으로 싹 정리된 상황이었다. 회사는 우리가 복직하기 전까지 현장 관리를 했다. 민주노조 조합원 하고는 아예 말도 못 섞게 단속을 한거다. 물론 업체가 많다 보니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의장 쪽에서 일했던 동지는 관리자들이 대놓고 욕하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만들길래 우리가 모여서 그 업체를 쳐들어가서 관리자랑 푸닥거리를 했던 적도 있다. 관리자들은 우리를 늘 감시하니까 동료들이 말 섞는 것도 못 했다. 밥 먹을 때도 옆에 아무도 앉지를 않았다. 언젠가는 제가 한 번 동료들 옆에 가서 앉아봤는데 한 이틀인가 지나서 한 놈이 따로 얘기 좀 하자더라. 그러더니 하는 말이 미안한데 애들이 네가 옆에 앉아서 정말 불편해한다고 그러지 말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래 그러냐 그랬다."

복직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분위기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막 복직했을 때처럼 긴장이 있는 건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관리는 한다.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회식이 있었다. 회식 때도 다들 제 옆에 오기 힘들어하는데 조금 말이 통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술이 좀 들어갔는지 저한테 사장하고 너무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그러면서 나랑 같이 가서 사장한테 술 한잔 따라주고 오자는 하더라. 저는 됐으니까 너나 갔다 오라고 그래서 혼자 갔는데 다시 오더니 표정이 일그러져서 오더라. 이 친구 딴에는 뭔가
관계를 풀어보려고 한 건데 사장이 진일이랑 친하게지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왔다."

이런 회식 자리도 너무 괴롭고 힘들 것 같았다. 나라면 저란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맞다. 사실 회식에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일부러라도 꼭 갔었는데, 그때는 아예 회사가 회식 때 제가 앉아야 하는 자리를 만들고 옆에 관리자들로 포위시켜 버리기도 했는데 그나마 싸워서 관리자들이 옆에 없는 거다."

큰 전환점을 맞은 산재 인정 투쟁

동희오토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황재민 씨 산재인정 투쟁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환점을 어떻게 마주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현장에서 일하다 사람이 쓰러질 정도면 뭔가 이야기가 들리는데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저희랑 알고 지내는 공장 형님이 정문 앞에 어떤 여성분이 피켓을 들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다음날 동료들이랑 가봤는데 황재민 씨 아내분이었다. 일단 연락처 주고받고 다음에 상황을 들어보니 이미 산재를 한창 진행해서 심사청구가 끝나고 재심사청구를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저희가 노안투쟁이나 산재 관련해서 고민이 적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고 충남 갑을오토택에 있는 안재범 동지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 이훈구 동지께 도움을 요청했다."

동료들은 두 분에게 이번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복직은 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못 하고 있는데, 이것마저 듣는다못하면 민주노조가 있는 게 별 의미 없지 않겠냐. 그래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다시 산재를 신청해서 진행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투쟁하면 회사가 황재민 씨에게 보상하고 산재는 법원에 가서 다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재범 동지와 이훈구 동지가 회사에서 공단에 거짓 자료를 제출하는 등 산재 조사 과정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으니 근로복지공단에 재조사를 요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견을 줬다. 비록 전례는 없지만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특집 3. 분임조 활동으로 소중한 민주노조 지켜냈어요! - 갑을오토텍지회 조균형 조합원 인터뷰 /2015.9

분임조 활동으로 소중한 민주노조 지켜냈어요!!!
- 갑을오토텍지회 조균형 조합원 인터뷰

 

 

 

선전위원회

 

 

길고 힘들었지만 어느 때 보다 조합원 스스로 나섰던 이번 투쟁!! 싸움의 당사자였던 조합원들은 이번 투쟁 과정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지난 8월21일 갑을오토텍 지회 사무실에서 조합원 조균형 님을 만나 소회를 들었다. 조균형 님은 갑을오토텍에서 21년째 일하고 있는 노동자로 2005년에 대의원, 2010~2011년 노동조합 조사부장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초반에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피켓 들고 일인 시위 하는 모습 보고 감동 받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첫 피켓팅한 3인 중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행동에 나서게 되었나?

 

나는 그냥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은 셈이다. 박종국 조합원이 제안했고 나랑 손찬희 조합원이 초기에 참여했다. 작년에 신규채용 60 명이 됐는데, 이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제보가 2월부터 계속 됐다. 사실 기업노조 만들면서 복수노조 만들어서 노동조합 흔들려는 움직임은 2010년경부터 감지됐던게 있었기 때문에 조합에서 차분히 대응하는 편이었다. 초반에는 주로 외부에 이런 문제를 알리고, 정보를 모아나가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박종국 조합원이 조합원들이 먼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거다. 작년 두원정공 투쟁 때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피켓팅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200일 투쟁했다고 했으니, 우리도 200일이라도 버티겠다는 생각이면 승리하지 않겠냐며 시작했다. 피켓팅 시작한 날,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조합원 중 한 명, 늙은 노동자가 ‘나는 어차피 여기 떠나면 갑을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정년하기 전에 투쟁이라도 같이 할 수 있어서, 이 투쟁 같이 해서 후배들에게 노동조합이라도 지켜서 남겨주고 갈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그 내용이 대자보로 붙고, 채팅방에서 공유됐다. 조합원들이 이런 얘기에 공감하고, 서로 감동받았던 것 같다. 3명으로 시작한 피켓팅이 8명, 20명 하다가 제일 많을 때 200명까지 늘었다. 처음에 간부들이 아침에 나오면, 우리가 오지 말라고 했다. 조합원들이 조합이 시켜서 하는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이 동한 조합원들이 만들어간 투쟁이 됐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투쟁을 알리고, 동참을 이끌어 내는 데 SNS 등을 잘 활용한 것 같다

 

정말 SNS 활용을 잘 한 것 같다. 피켓팅 시작하면서 사람들 모아서 처음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는데, 점점 확대돼서 나중에는 거의 전 조합원이 참여하게 됐다. 초반에 피켓팅 사진도 올리고 하면서 서로 격려가 됐고, 사진이 계속 올라오니까 조합원들 사이에서 ‘오늘은 누가 참여했구나, 오늘은 누가 안 보이네’ 하는 얘기들이 되고, 안 나오는 사람에 대해 독려도 하게 됐다. 또 카톡 채팅방을 통해서는 토론도 많이 하게 돼서, 소통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무전기보다도 더 빠르게 상황 공유가 되더라. 조합원들이 토론도 했지만, 위안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투쟁하는 동안 늘 교섭 속보를 그렇게 기다린다. 실제 내용이 궁금해서라기보다, 모르고 있는 상황이 불안한 거다. 평소에 눈 뜨고 살던 사람이 눈 감으면 불안한 거랑 같은 거다. 그런 불안감을 카톡 단체방이 덜어준 거 같다. 상황이 바로 공유되고, 그 상황에 대해 서로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중간에 낮 시간 투쟁이나 연대 활동에 2조(주간연속 2교대의 후반조)가 참여하는 과정도 카톡 단체방 토론을 통해 시작하게 됐다. 한 대의원이 ‘요즘 간부들이 밖으로 다니느라 바쁘다, 기자회견하고 외부 사람들한테 우리 상황 알리고 있다. 그 와중에 고용노동부, 경찰서 이런 데서 1인 시위 하고 있는데, 2조가 잠 조금 덜 자고 같이 하자’는 얘기를 카톡방에 올리고, 조합원들이 ‘그래, 좋다’하면서 시작된 거다.

 

가족대책위도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대책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들이 참여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가족들 동참도 자발적으로 시작됐다고 들었다

 

피켓팅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딸이랑 얘기를 하게 됐다. 이러저러해서 아빠가 선전전 하느라 매일 새벽에 일찍 나가고, 주말마다 바쁜 거다 그랬더니 딸이 ‘피켓팅 나도 할까?’ 하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할 거면 피켓은 네가 예쁘게 만들어 와라 했다. 그랬더니 열심히 만들어서 어느 날 아침에 피켓팅을 같이 나갔다. 그 때쯤 피켓팅이 좀 뻔해지는 것 같았는데, 이벤트가 된 거다. 역시 또 사진 찍어서 올리고 그랬더니 조합원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되더라. 그러면서 다른 조합원 가족들도 여러모로 참여하게 됐다. 이 얘기를 했더니, 아들 녀석이 자기도 투쟁 기금으로 20만원을 보태겠다고 하더라. 딸도 자기랑 동갑인 다른 조합원 형님 딸이랑 돈을 모아서 밥버거를 400인분 사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또 다들 신기하고 재미있으니까 화제가 되고, 얘깃거리가 되고, 분위기가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도, 우리 가족들도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던 것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좋다. 주말마다 나가고, 약속 많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부인이 불만을 갖기도 했는데, 이번 투쟁에 같이 참여하면서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가족대책위들, 피부 관리해야 할 사람들인데 땡볕에 얼굴 벌개져서 투쟁하던 장면들은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기도 하고, 저 사람들까지 나오게 하다니 암울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제안과 자발적인 분위기가 조합원들에게 활력을 줬고, 조합원 스스로 자기 투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 투쟁을 통해 느낀 게 조합원들에게 숨겨진 저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노동조합 조사부장 할 때 조직 분석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했었다. 복수노조 등 바람이 불면 훅 갈 수도 있겠다고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몰랐던 조합원들의 저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끌어내는 계기와 모아내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거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 정말 바닥으로부터 그런 힘이 올라왔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분임조 활동이 시작됐다. 다른 지회들도 분임조 활동은 꼭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도 몇 년 전부터 분임조 얘기를 했다. 확대간부들이나 실천단은 교육도 몇 차례 받았었다. 그런데 우리도 ‘좋긴 하지만, 그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현장내 구역별로 친목 모임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이번 투쟁이 자연스럽게 분임조 활동의 시발점이 된 거다.

 

분임조가 토론과 행동의 단위가 되면, 조합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지금 우리 분임조는 5명인데, 토론을 하면 누구든 한 마디씩 꼭 하게 돼 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다가도, 자기 얘기를 하게된다. 불안한 마음, 반대 의견, 걱정되는 부분도 얘기가 나오게 되고, 서로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이된다. 또 같이 결정한 내용은 ‘나는 빠져도 되겠지’하는 생각을 못 하고 꼭 같이 지키게 된다. ‘전 조합원 모여라’ 하면 400명이니까, 나 한 명 빠져도 되겠지 싶은데, 분임조마다 5명씩 연락을 돌리니까 내가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업노조 만들어 나간 사람은 우리 분임조 활동보고 ‘5호 담당제’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우리도 분임조 활동이 이제 시작된 거고, 정착된 것은 아니다. 분임조마다 활동 방식도 다양하고, 아직 운영이 서툰 조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다 잘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조합에서 잘 될까?’ 이런 생각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시도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분임조 활동을 통해 노동조합 내적으로 조직력이 강화되고,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참여도가 높아진 것이 이번 투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갑을 조합원들이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자판기 노조’ 탈피하자는 얘기를 많이 했다. 조합원들이 간부들에게 ‘이 문제 해결해줘’하는 것을 안 했다. 구역 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구역 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구역에서는 몇 년 전에, 조합원들 근무 태도 가지고 시비 걸고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생산과장을, 조합원들이 항의하고 현장 투쟁 벌여서 바꿔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훈련이 돼 있다가, 죽기 살기로 투쟁해야 하는 시점이 되니까 터져 나온 것 같다. 조합이 시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간부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 투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격적인 싸움만 해도 2달이 넘고,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부터 치면 거의 6개월이다. 지치거나 힘든 때도 있었을 텐데 피켓팅 처음 시작한 게 4월 8일이었으니, 4달 정도를 정신없이 지냈다. 사실 그 동안은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것 같다. 그 사이에는 개인 생활이라는 게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물론 투쟁하는 동안 나도 겁났고 무서웠다. 평생 사람들이랑 싸울 일 없이 살아왔는데, 웬 깡패 같은 사람들이 현장에 들어와 돌아다니니, 무섭기도 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 이런 얘기도 조합원들하고 많이 했는데, 얘기하다보면 다들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위안도 받고, 다시 힘낼 수 있었던 것 같다.

 

8월 들어 현대차에 공급할 물량이 정말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관리직에서 직접 기계 돌리겠다고 할 때 나도 불안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우리가 처음 이 싸움을 시작할 때 이 싸움에서 진다면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절박함이 있어서 조합원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섰던 거다. 그렇게 치면 싸우다 져도 죽는 거지만, 물량 때문에 지금 그만두면 그냥 죽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 마음을 조합원들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조합도 대처를 참 잘 했다. 사무직 투입해서 기계 돌리겠다고 했을 때, ‘그럼 너네들 특별안전교육은 받았냐?’고 던지고 노동부에 고발하면서 충돌이 더 진행되지 않도록 하면서 막바지 투쟁이 잘 될 수 있었다.

 

복수노조를 등에 업고 민주노조 탄압하는 경우도 많고, 민주노조 패배 소식도 많았는데, 이번에 갑을이 긴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하게 되어 의미가 크다. 조합원 입장에서 가장 중요 하게 생각되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제일 큰 것은 노조파괴 시도에 대항해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용역들 일부는 기숙사에 남아 있고, 다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노조파괴 시도는 노동계가 전국적으로 직면한 문제인데, 여기에 우리 투쟁이 반전의 계기를 만들수 있었다면 좋겠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조합원들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분임조 활동 등을 통해 조직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투쟁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걸 다시 짚는 평가는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어떤 때든 완벽하게 준비돼서 투쟁할 수는 없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든 조합원들이 함께 잘 버텨준 것이 중요했다고 본다.

 

특집 1.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2015.9

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선전위원회

 

 

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과하며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등장한 이후, 30년이 지났다. 현장의 민주적 역동성은 어느 새 80년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추억으로만 여겨진다. 민주노조 건설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 국면이 일단락되고 노사 관계에서 제도적 측면들이 완성됨에 따라,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대리하거나 대행하는 데에 머물게 된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노동자 개인은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지침을 이행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 통제 가능하지 않은 자발적인 투쟁은 환영받지 못한다. 민주적 역동성을 잃고 제도화된 노동조합은 ‘관리된 투쟁’을 조직한다. 의례화된 임단협 투쟁 일정, 자조 섞인 ‘뻥 파업’ 등은 노동조합 운동의 현재를 보여주는 한 단초다. 나아가 투쟁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현장의 역량에 대한 믿음 자체가 약해진지 오래다. 관성화된 조합 활동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수동적인 개인으로 여겨지고, 사회적으로는 자기 밥그릇 챙기는 정규직 노동자 취급당한다. 이런 노동조합들마저 사측의 주도 아래 극단적인 폭력으로 깨져나가 억압적인 어용노조로 교체되는 것이 복수노조 시대 민주노조의 현실이기도 하다.

 

투쟁 속에 실현된 조합원 민주주의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사측의 노조 파괴시도에 맞선 한 노동조합의 투쟁이 이목을 끈다. 금속노조 ‘갑을오토텍 지회’의 투쟁이다. 복수노조 도입 이후, 어용 노조를 활용한 민주노조 파괴가 노무법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까지 된 마당에, 갑을오토텍의 노조 파괴 시나리오 자체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뒤 진행 과정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의 지침을 넘어서는 활동을 제안했다. 1인 시위도, 가족 연대 활동도, 교대제 2조의 오전 투쟁 결합도, 조합원 스스로 채팅방을 통해 상황을 나누고, 토론하고, 투쟁 방안을 제안하고, 호응했다. 노동조합은 이런 조합원들의 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고, 이런 주체적인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고 살리는 투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부터 고민하던 분임조 활동을 본격화해 실질적인 소통과 논의 구조가 될 수 있도록 조직했다. 갑을오토텍지회 안재범 노안부장은 “평상시처럼 지도부나 확대간부들만 공유하고 판단하여 결정했다면 조합원 동지들의 자발성, 역동성은 고사하고 기세도 떨어져 투쟁을 말아 먹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균형 조합원은 “우리가 몰랐던 조합원들의 저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끌어내는 계기와 모아내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다시 발견한 조합원의 자발성과 주체성

 

갑을오토텍 조합원들에게 주체적인 활동의 영감을 준 것이 두원정공 투쟁이다. 2014년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두원정공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만들어간 투쟁이 힘이 되었다. 2014년 두원정공 지회의 투쟁은 사측의 단협 위반으로 시작되어, 교섭이 교착 상태에 있으면 폐업절차를 밟겠다는 사장의 발언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폐업 발언이 나오자 조합원들이 스스로, 당시 지침으로 시행하고 있던 1시간 파업을 전면파업으로 전환시켰다. 노동조합도 이런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조합 지침 대신 소단위(중대)별로 파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노래가사 바꾸기 대회, 계열사 노동자 만나러 광주에 가기, 사장을 만나러 집이나 두원공대로 원정투쟁 가기 등 이었다. 조합원들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두원 자본을 때려눕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런 투쟁 과정에 대해 엄정흠 두원정공 대의원은 “언제부터인가 투쟁이 지침에만 의존한다. 이러니 투쟁을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측면도 있고, 그런 투쟁에 간부도 조합원도 익숙해진다. 지침을 떠나 자발적으로 투쟁하자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조합원들이 지침을 내려달라고 하기도 했지만, 막상분임조 활동이 활발해지고 매일 1시간씩 중대 총회가 벌어지자 자연스럽게 갖가지 활동을 제안하고 주체로 나섰다. 정작 판이 열리니 조합원들이 다 알아서 하더라.”고 회상했다.두원정공 지회라고 전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합간부들이 이렇게 해도 되나 할 정도로,기세가 올라오는 게 무서웠다. 조합 활동 오래 한 간부들에게 조합원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거다. 조합원들의 투쟁이 간부들의 계획을 넘어서면, 결국은 그 부담이 조합으로 온다. 그러니 집행부도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받아 안을 수 있어야 한다.”

 

노조는 민주주의 학교라는데 주목해야

 

갑을이니까, 두원이니까 가능했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한편으로 단사의 투쟁 성공사례를 접하며 고군분투하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았으면 한다. 다만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 유지되며 자본의 지배와 관리를 일부 대변하는 존재가 아닌 자본의 논리를 꿰뚫어 세상의 질서를 바꿔내는 노동자들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 투쟁과 경험에서 함께 배우고 읽었으면 한다.

<일터> 통권 140호 / 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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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특집] 노조파괴를 이겨낸 아래로부터의 힘

28 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30 갑을대첩 비책공개

34 분임조 활동으로 소중한 민주노조 지켜냈어요!!


4 [노동안전건강뉴스]


8 [지금 지역에서는]

  폭염을 뚫고 전국석면피해자들이 모였다!!


10 [달려라 건강권, 날아라 노동자]

   현장에서 사용하는 물질, 알고 사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12 [안전보건활동 참고서]

    발암물질조사사업


14 [현장의 목소리]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김명성 금속노조 마리오 아울렛 분회장 인터뷰


18 [A-Z까지 다양한 노동이야기]

    "친정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펴드립니다"


22 [연구소 리포트]

    2015 산업단지 노동자 건강권 실태조사


26 [사진으로 보는 세상]


38 [직업환경의학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


40 [지키고 되살리자, 작업중지권]

   일하는 노동자의 생명, 건강, 삶을 지켜내는 작업중지!


44 [시간의 재발견_노동시간 에세이]

    나인 투 나인(9 to 9)의 사회,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48 [문화읽기]

   설악산 케이블카가 산의 민주화?


50 [유노무사의 상담일기 더불어 與]

   10년 걸린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합법화


52 [일터 다시 보기]

   노동시간 단축은 상식!


54 [이러쿵저러쿵]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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