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학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요/ 2015.8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요



권종호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공의


전공의 4년 차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건관리 대행 업무를 시작했다. 보건관리 대행은 병원과 계약된 사업장들을 돌아다니면서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특별한 이상은 없는지, 작업과 관련된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고 이에 대한 상담과 관리를 하는 업무이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사업장을 전담해서 매달 다니시지만, 의사는 분기별 혹은 상하 반기로 나눠서 방문한다.


처음 보건관리 대행을 다니면서 날씨가 덜 풀린 탓에 추위에 고생을 많이 했다. 유난히 경기 북부에 대행사업장이 많은 우리 병원의 특성상 가는 곳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고 출장용 소형 차량은 그 칼바람을 이겨내기엔 상당히 버거웠다. 간혹 난방도 잘 안 되는 창고 같은 공간에서 상담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공장 안 작업장보다는 따뜻한 곳이라니 감사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건강 상태도 제대로 모르고 일에 치여 살던 분들에게 혈압·혈당 등 건강 체크도 해드리고 건강 문제와 관련해 상담해드릴 수 있는 점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가질 수 있는 큰 보람이다. 대부분은 혈압·혈당 등 간단한 검사에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간혹 심각한 수준의 고혈압이나 당뇨병 의심 상태를 보이는 분도 있었다.


비만·흡연·음주 관련 상담도 중요하지만, 고혈압·당뇨병 등 질환이 있는 경우 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기에 그런 분들에게 왜 치료가 필요한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꼭 병원에 가 보시라고 권해드렸다. 보건관리 대행 사업이 상당히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서면으로 전달되는 건강검진 결과표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몇 달 뒤 같은 사업장들을 돌면서, 제대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분들을 다시 만나야 했다. 이런저런 설명 끝에 꼭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가보셨단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다. 요즘 병원들 평일에도 저녁 7시, 8시까지 하고 주말에도 여는데 거길 못 가보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 했더니 평일에도 10시에 끝나는 날이 부지기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데 일 끝나면 쉬고만 싶다고 하신다. 할 말이 없었다. 병원이 아무리 늦게 까지 열어도 갈 시간이 없고, 갈 힘이 없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것이다.


한국의 '미충족 의료 비율' 높아


'미충족 의료'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당장 아프거나 지속해서 병원에 다녀야 하는 질환이 있음에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국가 별로 비교해 보면 보건 복지 정책의 수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미충족 의료 비율이 높을수록 보건 복지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보건 복지 포럼에서 2013년 발표된 '우리나라 건강수준과 보건의료 성과의 OECD 국가들과의 비교'라는 자료에서 발췌한 표이다. 한눈에 보일 정도로 한국의 미충족 의료의 비율이 높다. 또한, 인지된 건강 상태도 낮게 나타나, 건강 상태는 전반적으로 안 좋은데 병원에는 잘 가지 못하는 상태 혹은 병원에 잘 못 가서 건강 상태가 전반적으로 안 좋은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2010년에 더욱 악화하여 다른 OECD 국가들보다 현저히 동떨어진 수준을 보여준다. 사실 자료를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  김혜련, 여지영 '우리나라 건강수준과 보건의료성과의 OECD 국가들과의 비교' (2013)


이와 관련하여 2014년 정책보고서인 '한국 의료패널로 살펴본 우리나라 보건의료'라는 자료를 보면 이러한 미충족 의료의 원인은 65세 미만의 경우 시간 부족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65세 이상의 경우 경제적 이유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의학 기술로는 의료 선진국이고 공공 의료 보험 제도를 갖춘 나라, 병원을 개원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많은 병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에도 시간과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노인·장애인·도서벽지 주민의 물리적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을 이유로 원격 진료부터 시행해야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첨단 장비와 우수한 인력을 마련해 두고 환자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병원이 곳곳에 있음에도 갈 시간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있다는 현실. 경제 성장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챙기지 못한 노동자의 건강권이 처한 현실이다. 그나마 노동자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만든 특수 건강 검진, 보건관리 대행도 노동자에게 병원에 가고 치료받을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주지 않는 이상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않을까.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여유롭게 내 건강을 챙길 수 있는 날,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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