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통권 173호 / 2018.07


<일터> 통권 173호 / 2018.7

특집 : 노동자 건강권 vs 기업의 영업비밀


4 작업환경측정결과 보고서와 삼성의 몽니 
8 백혈병 소송을 통해서 본 작업환경측정결과 보고서에 대한 소고 
10 노동자 건강권의 바로미터 
14 노동자 알 권리 거부하는 인천공항공사


16 [지금 지역에서는] 
충남서북부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의 시작과 앞날


18 [국제 노동안전건강뉴스] 
산재 사망증가와 트럼프 정부의 예산 축소


20 [국제 안전보건기준에 관한 비교 검토 연구] 
건설업 안전보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22 [연구 리포트]
경기도 버스 운전 노동실태(2)


26 [안전과 건강 칼럼]
빛바래선 안될 청사진


28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과로와 인종주의 영화 <히든 피겨스>


31 [사진으로 보는 세상]


32 [A~Z까지 다양한 노동이야기]
저희는 영어하는 기계가 아니에요


36 [현장의 목소리]
실적이 인격이라 하는 회사를 향한 IT노동자들의 싸움!


40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우리 현장에도 노조가 생겼어요!


46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입사 6개월 만에 폭삭 늙는 신규 간호사들에 대한 이야기


48 [노동자 건강 상식]
B형 간염


50 [유노무사 상담일기 더불어 與] 
근로감독관의 과로사와 워라밸


52 [문화 읽기]
“우리의 죄는 증대하다”

54 [이러쿵저러쿵] 
내 인생의 시간으로 기록될 노벗 수습 노무사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우리 현장에도 노조가 생겼어요! -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모비스 화성지회 인터뷰 / 2018.07

우리 현장에도 노조가 생겼어요! 

-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모비스 화성지회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같은 현장에서 일하지만 업체가 다르다고 말도 못섞게 했다.”

“아내가 출산하기 직전인데 네가 가서 뭐 할 게 있냐고 응급차 부르고 계속 일하라고 했다.”

“아버지 임종도 못 지켜드리고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현대모비스 화성지회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으며 일해왔다. 회사가 하라는 대로 길들여져서 그게 문제인 줄도 몰랐다던 그들이, 최근 노조를 만들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이후 조합원들은 UPH 속도에 내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속도에서 일하겠노라 외치며 투쟁에 나섰다. 이후 10년, 20년 일해도 바뀌지 않던 현장이 개선되고 있다. 투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현장에 다녀왔다. 인터뷰는 지난 5월 30일에 황원준 부지회장, 오성민 조직부장, 박흥일, 서동영 노동안전보건부장이 함께 했다.


▲ 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해 노동조합으로 하나된 금속노조 현대모비스 화성지회 조합원들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

“현대모비스 화성지회는 기아자동차에 직서열 납품하는 회사고 최근까지 8개 업체가 있었어요. 지금은 노조를 만들고 나서 조직 체계 개편한다고 3개 업체로 통합해서 정리한 상황이에요. 주로 하는 일은 자동차 운전석, 엔진 바디 등을 만들어요. 아무리 밤낮으로 일해도 월급은 늘 최저임금이에요. 물론 성과급은 있지만요. 10년을 일하나 이제 막 들어오나 월급이 같아요.”

노동자들은 높은 노동강도와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해 작업자들은 수시로 일을 그만뒀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전에는 회사가 무조건 집에 가라고 했어요. 일하다 부품에 불량이 나도 집에 가라, 아프다고 해도 집에 가라 그랬죠. 일을 조금 늦게 하거나 못해도 집에 가라고 압박하고요. 어떻게든 집에 가라고 하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서 일하려고 하는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버티기가 힘든 상황이라 많이들 그만뒀어요.”

이렇게 노동자들이 그만두면 남은 이들은 더 고되게 일해야 했다.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을 최대한 늦게 채용하거나 아예 채용하지 않았다.


변화를 싹틔운 축구 동아리

“노동조합을 만들기 전에는 바로 옆 라인에 있어도 서로 대화를 전혀 못 했기 때문에 누가 다쳤는지 그런 걸 전혀 몰랐어요. 그나마 같은 업체에서 사고가나면 알 수 있었는데, 회사가 본인 부주의로 다쳤으니 개인 비용으로 치료받든지 그냥 출근하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되게 많았어요. 산재처리는 꿈도 못꿨어요. 산재 신청하면 인생이 망가지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세뇌를 시켰거든요.”

사고가 나도 모를 정도로 교류가 없던 현장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기 시작한 건 축구동아리였다고 한다.

“회사에서 사내 복지를 너무 안 하니까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진행하려고 축구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업체별로 팀을 만들어서 시합도 하고 연습하면서 인사도 하고 서로 현장에 관해서 이야기도 하면서 노조를 만드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도 자동차 부품회사고 일도 많아서 다들 지역에서 오고 싶은 회사 아니었냐고 묻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지인 소개로 많이 오지만 대부분 못 버티고 그만둬요. 아예 소개를 못 해주는 경우도 많아요. 내가 일하면서 인격 모독당하고 자존감 떨어져서 언제 그만둘까 그러는데 누구를 데려오기는 창피하죠. 지역 공단이 워낙 열악해서 밖에서 봤을 때는 좋아 보이는데 자랑할 만큼 좋지 않아요.”


노동조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몰랐어요. 전혀 관심도 없었고 자동차 하청업체에 노동조합이 많은 줄도 몰랐어요. 그나마 동료들끼리 술 먹으면서 ‘노조가 있었으면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무관심했던 노조를 어떻게 하게 된 건지 물었다.

“일하면서 부당한 게 너무 많았어요. 지인이나 친인척이 사망했는데 조문을 못 가게 하거나, 아내가 출산이 임박했는데 응급차 불러서 가면 되지 네가 거기 가서 뭐하냐고 일이나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지인 결혼식도 그냥 봉투나 하라 그러고. 아버지가 많이 위독해서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임종을 못 보게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3명이 해야 할 일을 2명이 하고 사람은 계속 그만두고 채용은 늦고 이러니 친구나 지인들하고 약속하는 게 불가능했어요. 결혼한 분들은 더 힘들어했고요.”


계약직 채용합니다

“현대모비스와 도급 계약을 맺는 상황이다 보니 사장들 대부분이 현대차나 모비스 출신이에요. 보통 5년 정도 계약을 하는데 그 기간 안에 돈을 남겨야 하니까 사람을 자르거나 계약직을 쓰거나 사람장사를 하죠. 연차를 강제로 보내서 돈을 남겨 먹고요. 결국 모든 피해는 일하는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해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나서 현재는 업체 사장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들은 현대모비스에 충성을 다해야 계약 기간을 연장 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사람 없으니까 철야 하고 집에 가라는 회사

“예전엔 하루 10시간씩 주야 맞교대로 일했어요. 1조가 아침 8시 반에 출근해서 19시 반에 업무 마치고, 2조가 20시 반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7시 반까지 이렇게요. 매주 교대했고 한 달에 주말 특근이 한 번, 많으면 세 번 있었어요.”

만일 급여를 덜 받더라도 몸이 힘들어서 상시주간 업무만 하게 하는 조치가 있었는지 물었더니 절대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아마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집에 가’ 그랬겠죠. 노동조합을 만들기 전엔 현장에서 무슨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 했어요. 우리 스스로도 ‘남들 다하는데 야간 뛰기 싫으면 집에 가야지, 혼자 왜 유별나게 굴어’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을 거예요. 회사에 길든 거죠.”

조합원들은 장시간 노동 못지않게 조금도 쉴 틈 없는 빡빡한 노동밀도가 더 힘들었다는 이야기도했다.

“저희는 직서열이다 보니 기아차가 하라는 대로 맞추느라 늘 오버타임하고 개처럼 일했어요. 2시간 일하고 10분 쉬어야 하는데 4시간 연속 일하고 쉬는경우가 태반이었죠. 아침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더 일찍 오라고 해서 청소시키고 조회 수당은 안주고 그랬었죠. 점심시간 40분 중에서 20분간 밥 먹고 남은 20분은 또 일했어요. 퇴근 시간 넘기면 통근버스 잡아놓고 계속 일 시키고요. 만일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겨서 반대조에 한두 명이 빠지면 철야까지 뛰었어요. 주간에 출근해서 야간까지 뛰고 다음 날 점심시간까지 일하다 퇴근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일하고 돈은 주간 근무 2번 한 거로만 쳤어요. 일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오죽하면 조합원들이 일하다 화장실 가고 싶어서 노조 만들었다고 하거든요.”

2013년 주간연속2교대로 전환하면서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생산량은 똑같아서 오히려 노동강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노동조건과 관련해서 연차나 휴가는 제대로 썼는지 휴식은 어떻게 취했는지 물었다.

“기본적으로 인력 운영이 빡빡해서 연차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아파도 일했는데요. 연차 수당안 주려고 강제로 쉬게 할 때만 쉬었어요. 날짜는 회사가 며칠 전에 정해줘요. 다음 주 화·수·목 이렇게 쉬라고요. 이러면 어디 여행도 못 가요.”


‘그냥 여기에 싸인해’

“출근 시간에 청소시키면서 조회도 같이하는데 수당으로 월 2~3만 원 줬어요. 회사는 그걸 안전교육이라고 주장했어요. 한창 일할 때 사인하라고 종이가져오니까 다들 내용 확인도 못 하고 서명했어요. 안전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서류를 꼭 일할 때 가져 왔어요.”

“사내 게시판에 붙어 있는 취업규칙을 자세히 읽어보면, 관리자한테 반동분자로 찍히고 면담했어요.”

작업환경측정의 경우 외부 기관에서 진행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도 회사에서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노동자들을 지정해서 그들만 측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노동자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 만들고 당시 8개 업체와 통합 산보위를 하자고 제안해서 지난해 4/4분기부터 시작했거든요. 산보위에서 안전보건에 관한 개선을 위해서 돈, 시간, 인력, 실행방안 등을 논의하는데 진행이 너무 더디더라고요. 회사와 노동조합의 눈높이도 너무 다르고요. 산안법을 알고 보니까 현장에 위험한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1/4분기까지 협의를 계속 했는데, 회사가 돈 안 드는 건 바로 개선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개선을 안 하고 산보위도 파행시키더라고요. 그래서 회사가 우리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산안법을 준수해서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을 거라고 엄포를 놨어요.”

이후 노동조합은 안전센서를 끄고 일하던 공정에서 센서를 켜고 일하며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부품 생산이 늦어지면서 기아차가 납품을 드문드문 받았고, 결국 라인을 멈추게됐다. 기아차는 현대모비스 화성 때문에 라인이 끊어져서 손해를 봤으니 작업자에게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 할수 있다고 협박했다.

“문제는 이때 회사가 소장을 조합원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본가로 보내서 가족들이 다 알게된 거예요. 그래서 괜히 걱정 끼치고 개별 조합원도 괴롭고 두렵고 그랬어요. 노동조합에 소장을 보냈으면 단체로 싸우면 되는데 개인에게 보냈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어요.”

회사가 징계위를 열어 처벌하려고 하자 노동조합은 전체 카톡과 SNS로 현장 상황을 공유하고 간부 회의, 통합지회 회의 등을 통해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모든 조합원이 ‘나도 징계하라’는 내용의 변론서를 쓰고 대표이사 항의 방문을 하러 가는 등 투쟁에 나섰다.

“이 정도 되니까 회사가 징계위가 열리기로 한 당일에 고소를 취하했어요. 안전센서 켜고 일했던 설비는 3일 만에 80% 정도 개선했고, 민·형사상 소송하겠다고 한 조합원한테는 사과문도 발송했어요.”


투쟁으로부터 얻은 것, 자신감

“저희가 이 투쟁을 하면서 얻은 것은, 적어도 회사가 뭐 때문에 개선이 안 된다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거에요. 회사는 단 며칠이면 바꿀 수 있더라고요. 산안법에 대한 회사의 인식 수준이 밑바닥에 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은 정신 차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뿐만 아니라 조합원들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거 같은데 개인은 힘이 없지만, 개인들이 뭉치니까 이런 힘이 나온다는 걸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조합원들은 투쟁 과정과 결과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이번 투쟁 과정 자체가 좋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현장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사고순간부터 대응까지 함께하고 있어요. 조합원들 인식도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거 같아요. 이제 매달 한번 통합으로 현장점검도 하려고 준비 중이고,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에서 노안 관련 교육이 있으면 반드시 참여해서 공부하려고 해요.”


앞으로는 아픈 동료들이 없었으면

“산안법, 산재법을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단순반복 업무를 많이 해서 근골 문제가 심각하든요. 어떻게 아픈 사람을 치료받게 하고, 예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아프지 않은 조합원이 없는데 지금은 마땅한 대책이 없네요.”

“노동안전보건 활동이 쉬운 건 아닌 거 같아요. 저도 시작하면서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은 못 했거든요. 물론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데 힘든 건 현실인 거 같아요.”

“앞으로 조합원 중에 아프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일을 마쳤을 때도 건강하고 편안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그걸 위해서 올해 위험성 평가나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조사 시행을 고민하고 있어요.”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회사와 협상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고요. 조합원이든 간부든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는데, 오해가 쌓이게 두거나 감정싸움이 되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처음 노조 만들 때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언론보도] 빛바래선 안 될 청사진 (매일노동뉴스)

빛바래선 안 될 청사진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
  • 손진우
  • 승인 2018.07.05 08:00







지난 3일 대한문 앞에 또다시 분향소가 차려졌다. 2009년 대량해고 사태와 국가폭력의 잔인함으로 동료와 가족을 황망히 잃은 쌍용차 노동자들이 30번째 희생자인 고 김주중님을 떠나보내며 다시 대한문을 찾았다. 이들은 분향소를 설치하며 △쌍용차 해고자 전원복직 △손배·가압류 철회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고 김주중 조합원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2529

특집5. 문송면·원진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위 발족하다 / 2018.06

문송면·원진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위 발족하다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이진우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부장) 


19876월 항쟁 이후 대통령직선제 등 민주화를 일부 쟁취한 1988년의 여름. 고도성장과 서울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참혹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해 72일 수은중독으로 15세 노동자 문송면이 사망했고, 원진레이온 섬유 공장에서 집단직업병도 발병했다. 숨길 수 없는 한국 노동안전보건의 민낯이었다. 

1987년 말 중학교 졸업을 앞둔 문송면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낮에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끌려 현장실습 명목으로 온도계·압력계 제조 공장(서울 양평동 소재)에 들어갔다. 낮에는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장 기숙사에 배정받지 못해 수은이 널린 공장에서 자면서 온종일 수은에 노출된 것이다. 입사한 지 2달 만에 두통과 전신 통증, 불면증, 피가 날 때까지 긁을 정도로 심한 피부 가려움, 14kg의 체중감소, 잦은 구토에 시달렸다. 

결국, 2월 초 문송면은 휴직계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명도 알지 못한 채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굿까지 했지만 낫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3월에 찾아간 서울대병원에서 직업병을 의심하는 의사를 만났고, 수은·유기용제 중독으로 진단받았다. 회사는 시골에서 농약 중독이돼 아픈 것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사업주 날인이 없다" "서울대 병원은 산재지정 병원이 아니다"라며 산재신청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1988511일 자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리면서 노동부는 역학조사를 진행했고, 결과는 수은중독이었다. 6월에 겨우 산재 승인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노동운동가와 진보적 보건의료인들은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를 결성하고 16일간 장례투쟁을 진행한다. 장례투쟁은 산재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렸고 본격적인 직업병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도 직업병 피해자"라며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원진레이온(경기도 구리시 소재)은 펄프에 이황화탄소, 황화수소, 황산 등을 써서 인견사(레이온)를 만드는 곳으로 종사자 1500여 명 규모의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보호할 보호구나 안전설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수많은 노동자가 이황화탄소에 중독되어 전신 마비, 언어 장애, 팔다리 마비 등의 병을 얻었다. <한겨레> 보도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났고 노동자들은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업병 인정 투쟁을 시작했다. 노동부와 원진레이온 회사는 직업병 사태를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대책위원회는 원진 노동자 고 김봉환의 장례를 137일간 치루지 못한 채 투쟁했고 1991년에야 비로소 이황화탄소 중독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이 만들어졌다. 1993년에야 투쟁이 일단락되었지만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으로 인정된 915명 중 현재까지 230명이 사망했다. 공장폐업과정에서 치료와 보상 그리고 자활사업을 위해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설립되었다.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 투쟁은 87년 이후 폭발한 민주노조 성장 속에 시작된 진정한 의미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이었다. 이후 현장 변화와 제도 개선 등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1988년의 문송면과 원진레이온이 이름과 대상을 달리한 채 30년이 지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현장실습이라는 명목으로 엘지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콜수'를 채워야 했던 여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주도의 한 고교 실습생은 프레스에 끼여 사망했다. 외주 업체 소속으로 스크린도어를 혼자서 수리하던 '김군'은 문과 열차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문송면과 같은 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메탄올 중독이 2016년 삼성과 LG 핸드폰 부품 하청공장에서 발생해 7명의 불법 파견노동자가 실명했다. 

이제는 사례조차 찾기 힘든 수은중독이 2015년 광주 남영전구 공장 철거 과정에서 하청노동자 20여 명에게 집단 발생했다. 삼성 직업병 산재사망 노동자는 11년간 118명에 달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반올림의 농성투쟁은 이제 곧 1000(201872)에 다다르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 여러 노동안전보건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의 건강권, 취급하는 물질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 치료받을 권리 등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를 맞아 노동안전보건 문제를 다시 사회적 의제로 전면화하고자 범사회적인 추모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산재사망자에 대한 추모를 넘어, 노동자와 시민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지난 516일 추모위 발족을 시작으로, 6월에는 추모위원을 전국적으로 모집하고, 사업을 홍보할 계획이다. 71일에는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합동추모제, 2일에는 노동자·시민 안전보건의 달 선포 기자회견, 7일에는 서울에서 추모식과 추모문화제를 진행할 계획이다. 7월 첫 번째주는 사진전, 두 번째 주는 노동자건강권 전국 순회 뮤지컬 공연, 세 번째 주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제에 대한 제 대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후 내년까지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조형물 및 동판 건립을 할 계획이다.


1988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른 2018년에도 여전한 산업재해와 산재사망 문제에 경종을 울리자. 일하다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 사회, 노동자와 시민이 안전한 사회를 30주기를 디딤돌로 함께 만들어 나가자.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사업에 많은 연대와 관심을 기대한다.

특집4. 청소년 노동자의 건강권은 어떠한가 / 2018.06

청소년 노동자의 건강권은 어떠한가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부산지역 10대 청소년 노동자 인터뷰

이숙견 (한노보연 상임활동가)

 

올해는 15세 문송면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2018년 문송면처럼 노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청소년 노동자들은 어떠한 노동을 하는지, 어떤 문제와 고민에 직면해 있는지 지난 531일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올해 만 17세이고,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청소년과 관련한 활동을 하는 청소년 인권운동가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었나요? 

"여러 일을 했어요. 14세 때에는 전단지를 주로 했었고, 그 이후에는 편의점 일을 많이 했었어요. 그 사이에 찜질방 일도 했었고요. 기간은 편의점은 2년 정도, 찜질방은 2개월, 전단지는 6개월 정도 했습니다. 단기 알바로 하루 동안 떡 공장에서도 일했어요." 

일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독립된 저만의 비상금을 어릴 때부터 모아두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고요, 나중에 탈 가정 이후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어요. 사람이 숨만 쉬어도 돈이 들잖아요. 최근까지는 활동하면서 드는 비용 때문에 알바를 했었어요. 지금은 안 하고 있습니다." 

일할 때 어떤 하루를 보냈나요? 

"찜질방에서 했던 일을 말씀드리면 저녁 8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8시에 퇴근했어요. 야간 12시간 근무가 기본이었는데 주간 작업자랑 교대를 원래 근무시간 30분 전에 하고 퇴근을 30분 늦게 했어요. 일찍 오지 않으면 눈치를 줬어요. 저는 주로 카운터를 보느라 금액 정산하고, 손님들에게 입장권 끊어 주는 일을 했어요. 일이 고되기 보다는 밤새 계속 깨어있어야 하고, 불편한 의자에 12시간 내내 앉아 있을 때 힘들었어요. 게다가 8월 한여름에 일했는데 카운터라 에어컨 없이 일했어요. 아르바이트에게 맡기면 안 되는 일도 시켜서 여러 개 찜질방에 들어가서 온도 조절하는 일은 했는데 그때마다 약품이 이상해서 그런지 냄새도 많이 나고 오래 들어가 있으면 머리가 아팠어요." 

그밖에 월급이나 휴일 등 노동조건은 어땠나요? 

"찜질방은 주말개념이 없기 때문에 한 달에 휴일이 이틀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일해도 월급은 겨우 120만 원을 받았고요. 그때가 2015년인데 최저임금에도 모자랐고, 상시 5인 이상 사업장이었는데도 야간수당, 주휴수당은 당연히 없었어요. 상여금도 없었고 근로계약서 작성하자고 3번 이상 말했는데 결국 안 써줬어요. 한 달은 하루 12시간씩 밤에 일했는데 낮에는 인권단체 활동을 하느라 잘 못 쉬었어요. 평소에 일할 때도 4시간 동안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저녁도 알바비로 알아서 먹었어요. 이렇게 두 달 정도 하고 그만뒀어요." 

일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다들 이러한 노동환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찜질방 일도 만 18세 이상만 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서 했었거든요. 사장님들도 다 알아서 자기들이 불법을 저질러도 신고 못 한다는 걸 알아요. 편의점에서 일했을 때는 점주가 직고용을 안 하고 직영 노동자가 무슨 일 생기면 땜방으로 부르는 거예요. 한 달에 3~4번 정도 그렇게 2년을 했으니까 사실상 단기도 아니고 고용된 장기 알바라고 보는 게 맞죠. 제가 20살이었으면 고용을 했을 텐데 청소년이라 고용시장에서 배제되는 거예요. 이렇게 청소년들이 배제되니까 편의점뿐만 아니라 알바 구직 사이트에서 청소년 알바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사람이 기피하는 일자리 (제일 싸고, 제일 부려먹을 수 있는 곳)만 있어요." 

믿을 수 없었던 노동환경도 있었나요? 

"떡 공장에서 단기 알바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떡 사먹지 마세요. 위생적이지 못해서 구정물같은 데 떡을 씻고 정말 더러웠어요. 대부분 알바생들이 처음 여기를 오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고 오는 거죠." 

일하면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었나요? 

"제 이름으로 안정된 고용 계약을 할 수 없었던 점이 제일 어려웠어요. 옛날에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모동의라는 제도를 뒀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족쇄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집안 문제로 탈가정, 탈학교를 했는데 '부모님 동의서''학교장 동의서'를 받아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이상하고 불필요한 점이 많아요. 이렇게 되니까 일을 못 하게 막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이 안전하지 못한 위험한 현장으로 내몰린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생기거나 불이익당했을 때 신고를 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거든요."

 반대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있나요? 

"(단호하게) 없었던 거 같아요. 그나마 좋았던 기억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밥먹었을 때? 근데 그것도 먹을 수 있는 게 그날 그날 다르거나 아예 없는 날도 있어서 그럴 때는 굶었어요." 

일하다 다치거나 아픈 적도 있었는지요. 그럴 때 대처는 어떻게 했나요? 

"아픈 경우엔 사장님한테 자기 관리를 못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거 같아요. 아플 때도 당연히 일했어요. 한 번도 도움을 줬다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요즘 특성화고 현장실습생들이 일하다 사망하거나 자살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데 알고 있나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건 그분이 정말 죽는 거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요. 제대로 된 노동/안전교육도 한번 못 받고 숙련도가 낮고 어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이 혼나고 그랬겠어요. 게다가 학교에서는 아무리 일이 힘들다고 해도 못 그만두게 하잖아요. 저는 그게 가장 문제라고 생각해요. 너희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내년부터 이 회사로 후배들 실습 못 보낸다 그런 말을 들을 때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해결하려면? 간단하죠. 업체 관리를 계속하는 거, 취업률을 중심으로 학교를 평가하지 못하도록 해야죠. 이런 문제 때문에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스트레스를 받는 거잖아요. 그리고 노동법 교육이 과목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동법 교육이 안 되니깐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내가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조차 막막해하거든요." 

1988년에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하다 사망한 문송면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어요. 이분이 올해로 돌아가신 지 30년 되는 해라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에서 집회, 문화제, 토론회 등 개최하고 있는데 30년 동안 계속해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청소년 노동자 건강과 안전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변화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직고용과 고용 확대라고 생각해요. 노동하지 않아도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일을 하지 않고 잘 살겠어요? 청소년 복지가 잘 되어있지도 않고, 기본소득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 고칠 수는 없으니깐 청소년의 노동시장 진출 확대가 필요하고, 청소년 노동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더불어 청소년이 많이 일하는 직종을 분석해서 감시할 필요가 있고요." 

얼마 전 전국특성화고졸업생 노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청소년 유니온, 알바노조 등 청소년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여러 조직 등이 있는데요. 노동조합이나 이러한 조직체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청소년노동의 노동환경과 건강을 위해선 해야 할 역할이 뭐가 있을까요? 

"노동법 교육 정말 중요하죠. 입시 과목에 노동법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알 거 같아요. 지금은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상담받을지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청소년만을 위한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담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청소년 노동 활동가들이 자발적이고 계속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다고 생각해요. 청소년 노동 활동가의 존재는 정말 중요한데 운동조직에서도 정규노동이 아닌 형태로 차별받거나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글쎄요. '그만두고 나와도 괜찮다.'라는 말과 '우리 존재 파이팅'이요. 대부분 청소년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청소년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미 평일에 학교에 가고 주말에 알바하는 청소년이 많고 생계가 아니더라도 알바를 하는 경우도 많아요. 결국에 노동한다는 것은 나만의 경제적이고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모르는 거죠. 너무 극단적으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경험 아니면 생계중간이 없는 거예요. 비청소년들도 노동을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인거처럼 청소년도 노동 하는데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특집3. 2018년의 문송면을 만나다 - 1973년생 금속노동자 김현호 님 인터뷰 / 2018.06

2018년의 문송면을 만나다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1973년생 금속 노동자 김현호 님 인터뷰

 나래 (한노보연 상임활동가)


1973년생 15살 문송면. 그는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2개월 만에 수은중독에 걸려 숨졌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 시절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모두가 서울로 몰려들었다. 문송면도 그런 사연을 안고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혼자 서울까지 올라왔다. 

문송면은 병원을 전전한 지 한 달 만에 서울대병원에서 수은중독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지정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회사는 맹독성 물질인 수은에 관한 설명, 교육도 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는 15세 청년 노동자를 밤낮으로 일만 시켰다. 이 사건은 많은 노동자, 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장례식 때는 영등포 로터리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노제를 치렀다. 노동자, 활동가, 의료인, 시민들이 일터를 안전하게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외쳤다. 그의 죽음은 원진레이온의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을 알리고, 직업병 문제가 이슈화되는데 큰 발화점이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견뎌왔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 구의역 청년 노동자, 청년 드라마 PD, 메탄올 실명 사건,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문제 등 1973년과 2018년을 교차하는 노동자들의 아픔, 죽음 그리고 희망을 2018년의 문송면과 만나고 싶었다. 지난 525일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자동차 엔진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김현호 님을 만나 30년 전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현호 님은 1973년 문송면 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자동차 엔진 부품을 생산하는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신한발브에 다니며 노동조합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향도 충남 서산이라고 했다. 만약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본인도 충남에 살면서 우연이라도, 어쩌면 문송면을 만나지 않았을까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문송면 님이 서울에 올라와 수은공장에 다니지 않았다면, 수은중독에 걸릴 회사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일한 곳도 구로였어요. 지금 다니고 있는 신한발브에 입사해서 노동조합운동 할 때까지 살아계셨으면 벗으로, 동지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30년 전 문송면 님이 일했던 온도계 공장은 액체 수은이 깔렸고, 수은증기가 가득했다. 노동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직접 수은을 온도계에 주입했다. 결국 일을 시작한지 한 달 조금 지나 이상 증후가 나타났고 불면증, 발열, 두통 등에 시달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이 일하는 일터의 모습은 어떨까? 

"제가 다니는 신한발브라는 곳은 자동차 엔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원재료를 절단해서 열로 가열하고, 프레스로 성형해서 성형된 원재료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어요.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는 소음입니다. 소재 운반, 포장, 기계 장착할 때 중량물 취급도 많아요. 그래서 근골격계 질환도 많고, 오일미스트, 분진이 많이 날려서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해요. 설비가 비좁게 들어서 있어서 노동자들이 많이 부딪혀 찰과상, 좌상을 입는 경우도 많아요. 모든 재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곳이죠." 

18년 동안 일 한 본인 역시 작년에 어깨에 염좌가 생겨 치료를 받았다. 주변에 요양 중인 동료들도 있고, 요양까진 아니더라도 파스로, 물리치료로 버티는 이들이 많다. 2017년에만 현장에서 드러난 재해가 50건인데, 드러나지 않은 재해는 더욱 많다. 2014년도에는 경기도에서 재해율 2위를 차지했다. 회사는 특별근로감독을 받기도 했다.

[출처: 김현호]


김현호 님은 공장의 유해화학물질과 중량물 취급, 소음, 비좁은 공간 등도 문제지만 심야노동, 장시간 노동도 본인을 비롯 동료들을 신체적·심리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주요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장은 주간·야간 맞교대로 돌아갑니다. 주간근무는 오전750분에 시작해서 오후530분까지 8시간 근무를 합니다. 2시간 잔업이 있는 날은 저녁730분까지, 4시간 잔업은 저녁930분에 끝나요. 야간근무는 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6시까지 8시간 근무를 합니다. 잔업이 있으면 오전 8시까지 일 하죠. 보통은 잔업이 있어요. 제가 알고 있기론 71년에 신한발브가 창립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근무시간표예요."

 2013년 완성차 공장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를 시행한 이후 자동차 부품회사들이 연속적으로 교대제 변경을 진행했다. 장시간 노동과 심야노동 단축에 대한 노동운동의 요구와 싸움이 있었기에일궈낸 결과였다. 하지만 완성차 1차 하청업체인 신한발브에 바로 적용되진 못했다. 만성피로, 소화불량이 일상인 조합원들에게 장시간노동, 심야노동 철폐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1969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감독관에게 쓴 자필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돼 왔습니다." 전태일도, 1988년 문송면도, 2018년 김현호도, 장시간·심야노동은 노동자의 몸과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인간을 표현하는 여러 단어가 대체로 맞겠지만, 절대 틀린 게 바로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적응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입니다. 제가 주야 맞교대를 18년 동안 일을 했지만 절대 적응할 수 없는,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게 바로 심야노동이고 교대근무입니다." 

일터에서 다친 동료의 문제를 상담해주고 안전한 현장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그에게도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제가 2000년에 입사하고 얼마 안돼서 아내가 아이를 낳았어요. 현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방바닥에 잠깐 누웠다 일어났는데, 제가 일어났던 자리에서 아이가 쭉 미끄러져 뒤통수를 부딪 혔어요. 제 몸 자체가 오일미스트에 쌓여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현장에서 일하고, 동료들이나 저 역시도 중량물 취급 작업 하면서 재해를 입게 되고, 이 재해를 산재로 받지 못하고 공상조차도 쉽지 않았죠. 동료들이 그렇게 다치는데도 회사의 반응은 '너가 잘못해서 다쳤잖아, 너가 다친걸 우린 이해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안전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아이의 넘어짐으로 김현호 님은 세상을 다르게, 좀 더 곧게 바라보게 됐다. 그런 그에게 1973년 동갑내기 문송면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문송면 님이 돌아가시고 10년 후쯤 제가 27~28세에 신한발브에 입사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문송면, 원진레이온 등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문송면 님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노동자의 안전, 사회 전체 안전에 대한 내용들을 깊고 넓게 바라보면서 인식을 확장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윤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 안전이 먼저 고민되고 우선시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죠. 이 문제는 결코 우리 사회 지도층이나 자본에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일하고, 아프고, 다치는 노동자가 직접,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몸으로, 물리적으로 함께 하고 있진 못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그런 인사를 문송면 님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특집2. 노동안전보건 운동, 직업병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2018.06

노동안전보건 운동, 직업병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아이구 (한노보연 상임활동가)


예방에 앞서 드러나지 않은 직업병을 찾아야 

일하다 노동자들이 다치고 병들며 죽는 현실은 노동존중의 실상을 보여준다. 인권 유린 생명경시 그 자체다. 노동자의 몸, 마음, 삶보다는 이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 특히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책임을 다하지 않아 왔다. 자본은 법 뒤에 숨거나 법 자체를 우롱해왔다. 법에 걸리더라도 돈으로 때우면 된다는 식이었다.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금속 및 중금속 중독, 유기화합물 중독, 기타 화학물질 중독으로 인한 사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  2017년 산업재해 통계 중 질병사망자 현황 (안전보건공단 2017년 산업재해 통계 자료중 인용)


 2017년 정부 통계상 사고 사망자 수는 964명이고, 질병 사망자 수는 993명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사고사망자 수를 질병사망자 수의 14%로 추정한다. 대략 5890명이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여전히 재래형 사고로 인한 재해가 만연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부실한 업무상 재해 즉 직업병에 대한 인식과 대응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직업성 암을 비롯한 희귀질환과 뇌심혈관계질환으로 인한 직업성 사망 재해가 심각하게 은폐되고 있는 현실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직업성 질환 재해 역시 마찬가지다.

 

직업병 예방을 위한 과제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한 인식, 제도, 체계, 행동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노동자들이 병들고 다치고 죽는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의 삶까지 망가졌다. 참혹한 인권유린과 생명경시의 현실이 지속되어 온 이유는 명백하다. 제대로 바꾸지 않고 생색내기식의 대응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는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도 규제의 대상으로 삼아서 경제력 강화에 장애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는 헛소리가 여전하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를 임기 내 절반으로 줄이고, 재해율과 사고율을 낮추겠노라는 말뿐이다. 이 순간에도 노동자들은 다치고 병들고 죽는데 말이다. 

이윤보다 노동자의 몸과 삶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안전제일이라는 구호는 거짓이다. 경제와 산업의 필요에 종속된 접근으로는 산업재해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손실을 막거나 줄일 수 없다.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 각자에게도 스스로의 몸과 삶을 보다 건강하고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턱없이 부족한 보호 예방을 위한 예산과 인력의 문제에 대처해 나갈 수 있다. 또한 직업병을 일으키는 유해위험요인을 실질적으로 없애고 개선할 힘을 갖출 수 있다.

 정부의 책임을 노사자율에 떠넘기는 짓은 당장 멈추고 재해 발생 후 사후약방문식의 대응이 아니라 보호와 예방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조직의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고용노동부에 기획재정부와 같은 위상의 권한과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실효성조차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안전보건 관련 사적 시스템을 공적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첫걸음은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만들고 지키는 것을 통해 직업병은 물론이고 산업재해에 대한 보호 예방의 의무를 정부와 사업주들이 다하는 것이다. 특히 유해위험요인이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떠넘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 스스로도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안전 및 보건을 유지하고 증진해야 할 기준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이를 위해 필요한 쾌적한 작업환경에 대한 요구를 분명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지속해서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에 대한 실태를 파악·평가하여 관리·개선하는 권리 주체로 경험과 행동을 쌓아나가는 것에 애써야 한다.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의 경우 관행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검진, 측정, 점검, 근골조사, 위험성평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등 일상적인 안전보건 관련 활동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해당 사업장에 납품하는 회사의 노동자들이 처한 유해위험요인을 들여다보고 개선할 힘을 보태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다. 단위 사업장의 벽을 넘어 지역과 업종차원의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해보면 좋겠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위협받는 노동자들의 몸과 삶을 최우선시하고 제대로 지킬 경험과 힘을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우선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읽어보고, 자신과 현장의 노동을 제대로 보고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과제는 인식, 제도, 체계, 실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싶다. 그 과정에서 대행적인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 걸고 또 다른 한 걸음을 내딛을 주체들을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실천하며 힘을 키우는 것. 노동자들과 노동안전보건 활동 관련 주체들이 그 중심에 있다. 현실로 만들기 위한 꿈을 꾼다.

 

2015년의 경우, 암으로 사망한 76855명중 5% 내외가 직업성 암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 대한의사협회의 의견을 반영하면 직업성 암 환자의 예상 수는 3500명에 이르지만,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35명뿐이었다. 

뇌심질환으로 인한 사망역시 업무관련성 여부를 제대로 따지기 보다는 개인질환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현실 역시 주목해야 한다.

특집 1. 문송면과 원진 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를 맞는 단상 / 2018.06

문송면과 원진 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를 맞는 단상

[문송면·원진레이온 직업병 30년 무엇이 달라졌나] 과거와 현재의 만남과 헤어짐

김동수 (한노보연 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올해로 문송면과 원진 노동자들의 산재사망이 일어나고 사회화된 지 30년이 된다. 이 글은 한국의 노동자 직업병 문제를 대표하는 커다란 두 사건이 30년을 맞는 해에 어떤 부분이 해결되었고 어떤 부분이 문제로 있는지, 왜 그러한지에 대한 단상을 다소 논쟁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간의 30년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도 과학적·체계적으로 분석한 글도 아니다. 

이 글은 30년이 주는 무거움을 나누고자 작성하기 보다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펼쳐놓은 글이다. 따라서 독자들께서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과 수치들은 보기에 따라서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숫자나 통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문송면, 원진레이온, 김봉환 장례투쟁과 한국 노동보건운동의 시작

 문송면은 1973년생이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문송면은 중학교 3학년인 1987125일 서울의 협성계공에 입사한 후 2개월이 지난 198828일 병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후 고향의 의원들에서 원인을 못 찾고 39일 서울대에서 수은중독과 유기용제 중독의심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629일 성모병원으로 병원을 옮겨 치료를 받다가 72일 사망하였다. 사망할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또한, 1988년 원진 노동자들의 투쟁과 1991137일간의 김봉환 씨의 장례투쟁은 한국 노동보건 문제의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1988년에 당시 나는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1987년 군부독재 타도와 호헌철폐의 거대한 물결과 그해 여름을 달구었던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조직화는 의과대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의과대학의 경우 1980년대 초반부터 '민중의료'라는 고민이 있어서, 사회문제와 학내 문제에 대한 노력이 거부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88년 여름 문송면의 죽음을 직면한 젊은 예비의료인(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한의대)들은 어떠한 의료인이 될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문송면이 질병에 이르게 된 사회적 문제와 질병의 진단과정, 산재요양의 어려움 등의 첩첩한 문제들은 당시의 의료계에 매우 큰 고민과 직업적 진로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배출된 의료계의 전문 인력은 이후 보건의료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명제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운동과 흐름을 이루게 된다.

 

노동안전보건 문제, 30년 전과 현재 공통점과 차이점 

문송면의 질환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현재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수은중독을 산재로 인정하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였으며, 수은중독을 의심하는 의료진도 소수였으며 진단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현재의 시점에서 석면환자의 경우 과거에는 결핵으로 진단하여 결핵 치료를 받은 경우가 대다수였고, 본인들도 결핵으로 알고 가족과의 살가운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던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접할 수 있다. 호흡기내과 의사들 역시 석면폐를 미만성 간질성폐 질환(폐섬유화증)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영상의학전문의들도 석면폐 판독을 쉽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상이 이렇게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수은중독은 매우 희귀한 경우였고, 현재의 석면폐증 또한, 다른 질환에 비해 유병률과 발병률이 낮은 희귀한 질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의료진들 관심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과거 중독을 밝히기 위해 생체시료를 분석할 수 있는 곳이 몇 곳밖에 없었다면, 현재는 전국의 많은 기관에서 분석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사회/의료계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기술적인 발전의 측면에서는 다른 면을 갖고 있다. 과거에 기술적 측면에서 유해물질의 측정과 분석의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전국의 소수 기관이나 외국에 분석을 보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현재에는 시장성의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2015년 말~2016년 초에 집단적으로 발견된 메탄올 중독의 경우, 이를 진단하기 위한 생체시료 분석은 한국에서 실시하는 기관이 거의 없으며 외국에 분석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시장성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수은중독의 문제는 문송면 이후에도 여러 번 발생하였다. 2000년 경북 안동의 폐기물재생사업장의 3명의 노동자에서 집단 발생하였고, 2015년 광주 남영전구에서 형광램프제조시설 철거 작업을 했던 노동자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문제들은 수은이라는 공통점 외에 차이점이 존재한다. 과거 문송면의 경우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작업장의 작업환경이 열악하였고 노동자들의 건강에 관한 의식이 낮았다면, 최근 수은중독의 문제는 소규모사업장과 하청노동자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도 개선의 성과, 아직 남은 과제 

중금속, 유기용제 중독 등에 대한 제도적 진전은 여러 가지 경로로 이루어졌다. 과거 진폐를 중심으로 노동자 건강검진 제도가 발전해왔다면, 문송면의 사망과 원진레이온 중독을 시작으로 하여 중금속과 유기용제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산업재해추방 운동으로 표현되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자들의 노력은 1995년경의 쇠사슬 투쟁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집단유기용제중독 투쟁이었다.


[출처: 전국노동자연대] 


당시 노동자들은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해 특수검진과 작업환경을 제대로 시행하고 임시건강 진단 시행을 요구하였다. 이 결과 1996년 전국 선박건조와 수리조선 업체 도장작업자들을 대상으로 유기용제 임시건강진단을 실시하였고, 요식행위로 인식되던 특수검진과 작업환경측정제도의 실질적 개선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특수검진과 측정의 기관선정권을 획득하는 사업장이 늘어났다. 이 외에도 포항의 망간중독 집단 발병, 부산의 D.M.F. 중독사망 사건 등을 통해 특수검진의 실효성 증대를 위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작업환경의 개선과 특수검진 유소견자의 감소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성과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과제가 남아있다. 과거에는 열악한 작업환경과 전통적인 직업병의 문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면, 현재에는 소규모사업장과 이주노동자, 하청노동자 등 취약계층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취약한 소규모·하청·이주노동자 

이러한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부터 소규모 취약 계층 노동자들로의 문제의 중심이동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여전히 과거의 형태와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특수검진과 작업환경측정은 시장에 맡겨졌고, 시장을 어렵게 하는 행위는 이적행위(?)로 간주하기 일쑤다. 최근에 와서 노동자 일반에 대한 특수검진 상 유소견율과 작업환경측정상 기준 초과율이 1%가 채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를 현행대로 유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반면, 10인 미만 사업장과 하청, 건설업 등에서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검진 실시율이 매우 낮다는 점과 전통적 직업병이 이들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가는 명확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대기업 등에서는 기존의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검진의 유효성이 거의 없어져 가는 상황이지만, 소규모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이들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교통 오지, 소규모사업장,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상업성이 없어서 제도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016~2017년의 야간 노동 특수검진 제도 시행을 앞두고서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에서,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제도는 이제까지의 전통적 지지세력이자 이 제도의 산파로 자임하던 노동계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문송면의 사망과 원진레이온 집단 직업병 시절에 직업병 진단을 두고 임상의와 예방의학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임상적 직업병(환경병) 진단을 제대로 하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학문의 일환으로 출발점을 가진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제도는 전통적 직업병의 감소와 작업환경의 개선이라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 동반 성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생존이라는 생물체로서의 자기 보호적 측면이 더 강화되는 내외적 성장의 불균형 상태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직업병의 규모가 줄어들고 대기업 중심으로 노동환경의 개선에 따라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관심도 변화 확장되었다. 2000~2003년 근골격계 질환 집단요양 투쟁은 몇 안 되는 노동안전보건 문제의 사회적 의제화이자 승리한 투쟁으로 판단된다. 근골격계 질환 문제를 IMF를 지나고 노동강도 강화와 결합하면서 노동운동의 핵심영역으로 위치 지웠던 것 또한, 건강의 문제를 사회적 맥락에서 풀어내려는 중요한 시도로 판단된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집단요양 투쟁의 성과로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라는 제도적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화와 제도적 성과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씨앗으로 하여 조직적인 확장과 함께 의제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데는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노동안전보건운동, 다시 변화 모색해야 

이러한 점에서 현재까지도 노동안전보건 운동진영은 문제제기집단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거나 제한되어있고, 대안세력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시각을 갖고 계속적인 시도와 연습을 통해 단련되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근골유해 요인조사제도는 몇몇의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시행되지 않거나 형식화되어버렸다. 

30년 전 문송면과 원진 직업병 문제가 산재의 인정과 보상의 문제에서 시작하였고, 그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집단요양 투쟁과 산재 인정의 문제가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주요한 이슈였던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또한, 문제의 해결방식 또한 매우 투쟁적이고 자기희생적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노동자 건강 관련 이슈는 주요한 대상과 문제가 변화하고 있다고 볼 때,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대응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산재 인정의 문제가 한국에서 첨예하게 된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용어다)이 부실한 한국에서 산재로 인정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너무 극명해서, 이를 무시하는 것은 노동보건 활동가의 책무를 내버려 둠과 동시에 인도적이고 감성적인 문제까지 일으키게 된다. 알다시피 OECD 국가 중에서 상병수당(또는 상병급여)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아플 때 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노동능력이 없더라도 생계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국가의 의무이다.

 따라서, 현재 산재인정 투쟁 중심의 노동보건운동의 방식은 변화해야 한다. 상병수당을 도입하고, 산재인정은 곧 예방과 재발 방지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고의에 가까운 산재유발사업장에 대해서는 중과실 책임을 묻게 해야 하며, 건강하지 않은 노동자 상태를 가진 사업장은 사회에 공개되고 사회적 비판과 참여를 통한 시장 퇴출의 과정을 겪게 해야 한다. 

위 필자의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지평 확장 또는 다른 출발점을 가지는 시도는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된 바 있다. 반올림 활동은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산재인정투쟁으로 시작해서, 최근 삼성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의 문제라는 기업 영업비밀 대비 알 권리와 건강 문제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문제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실제 영업비밀이 들어가 있는가 아니냐는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서, 경제성장과 형평의 문제, 이윤과 생명의 문제라는 핵심적 가치충돌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노동시간센터 등을 중심으로 한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야간노동 및 장시간 노동의 축소라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고 있다. 다른 예로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발암물질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는 노동안전보건의 영역을 넘어서 시민사회까지 확장되어가고 있으며, 작업장의 여러 가지 문제가 매개가 되어 노동안전보건 이슈가 시민사회와 연대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해외 사례에 비추어 본 노동안전보건 문제 

핀란드의 높은 수준의 노동자 보호제도는 노동조합의 높은 노동자 조직률과 함께 노사정 합의에 근거한 바 있다. 한국에서 이제까지 노동안전보건 영역의 운동은 주로 대기업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이 주요한 추동력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건강문제를 조직노동자들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한국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에서 아직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노사정 핵심적 이슈로써 제기된 바가 드물었으며, 다른 의제에 묻히거나 노사정 관계가 어려워지면 자동 소멸되는 상황이다. 물론 노동안전보건 문제가 다른 사회적 또는 노동문제에 우선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문제가 해결되면 연속적으로 해결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면서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할 주체와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의 문제가 독자적으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다른 사회세력과 연대도 어려울뿐더러 사회적 주요 이슈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낮아진다. 네덜란드와 핀란드 등 국민의 수가 수백만 정도로 소규모 경제를 가지면서 수출 등 외부 국가와의 교역이 중요한 국가에서는 노동력이 국가생산력의 근간이며 노동력 고령화는 이를 가로막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들 국가에서 노동자의 안전보건의 문제는 국가생산력의 문제로 접근한다. 한국에서 이러한 접근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철학적·윤리적 정당성과 함께 현실적인 경로와 주체의 문제 등 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이 시대의 화두이다. 4차 산업혁명은 플랫폼 노동 등 노사관계의 변화와 노동형태의 변화 등을 일으키고 있다. 수많은 비정형 노동과 아동과 취약계층 노동이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노동형태의 변화와 새로운 직업성 질환과 상태에 대한 고민과 대응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다른 각도에서의 우리의 시각 확대도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기술적 발전과 변화를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 보호에 활용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아직 노동보건 운동의 시야에 들어와 있지 않다.

 

30년을 넘어, 새롭게 나아가야 

문송면과 원진 문제로부터 30년이 흘렀다. 30년이 한 세대라면, 이제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성인이 된 시대가 되었다. 노동자 건강과 관련 한 문제 또한 과거의 전반적인 열악한 노동조건과 엄혹한 사회적 억압에 대한 투쟁과 희생의 시대에서 이제 소수 또는 취약계층에게 문제가 집중되는 반면 노동자 건강문제에 대한 지평과 연대의 확대가 필요한 다양한 중층구조로 변화되고있다. 

문송면과 원진 30년이 지난 시점에 이제까지 직업적 원인으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희생 위에 수많은 노동자 건강권의 발전과 함께 과제도 쌓여있다. 과거의 유산과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들이 중첩된 문제들을 다양하고 다른 관점에서 풀어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2) / 2018.05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2)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최진일 조합원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황재민씨 산재 인정 투쟁에 돌입

"황재민씨 산재는 뇌·심혈관계 질환이다 보니 워낙 복잡한 문제여서 이것저것 확인할 자료가 많이 필요했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다는 자료에 대해서도 반박할 근거를 만드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내용적인 준비를 마치고 근로복지공단에 갈 때도 이미 불승인한 사건을 재심사해달라고 요청하는 초유의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다. 동료들도 마음이 통했는지 사전에 무슨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끝장을 보고 갈 마음으로 왔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생각보다 쉽게 재심사를 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회사가 자료를 거짓으로 제출한 점, 노동조합이 대응해서 싸우고 있는 점, 공단 내 여러 복잡한 문제로 잡음을 만들면 안 되는 상황으로 인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운이 좋다면 좋았다. 다시 산재를 신청하면서 현장 재해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근로복지공단과는 이야기가 풀리는 데 문제는 회사를 설득하는 거였다. 회사는 현장 조사를 하면 노조에서 누가 참여할 거냐, 민주노총 조합원은 때려죽여도 참여시킬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논의해서 노조 추천으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훈구 활동가가 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정해서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처음으로 현장 조사를 나오다 보니 회사는 물론 동료 노동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컸다.

"동료가 일하다 다쳤는데 산재를 신청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재해 조사를 나오고 산재 인정까지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처음인지라 현장 이슈가 됐었다. 이후 투쟁 끝에 결국 황재민씨는 산재를 인정받았다.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무엇보다 황재민씨가 장해가 계속 남을 건데 그나마 산재를 인정받아서 앞으로 남은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장 보상을 얼마 받았느냐보다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었다."

산재인정 투쟁 이후 조금씩 변화하는 현장

"동료들이 산재인정 투쟁 전체를 지켜봤기 때문에 현장에 민주노조가 있다는 게 알려졌고, 저 친구들이 몇 안 되지만 제대로 활동한다는 인지도가 생겼다. 그리고 현장 노동조건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체조를 근무시간 15분 전에 의무적으로 했는데, 현장조사가 시작될 즈음 체조를 자율적으로 바꿨다. 설비도 변화가 있었는데 자동차 테일게이트(뒤 뚜껑)과 후드(앞뚜껑)를 이송하는 리프트를 설치했다. 설치한 지 1년 정도 됐는데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도 있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은 황재민씨 산재 인정 이후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지속해서 이어나갔다.

"노동강도가 워낙 높으니까 현장에서 근골 환자를 찾는 캠페인, 잠깐 쉬는 시간에 앉을 수 있는 의자놓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현장엔 의자랄 게 없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박스를 깔고 앉았었다. 그래서 노동부에 진정하고 현장조사 하면서 현장을 휘젓고 다니니까 회사에서 의자를 주더라. 조금의 변화는 만들었는데 제일 문제인 노동강도 자체를 낮추는 것까지는 아직 못 가고 있다."

지역 활동을 고민하게 한 '행복한 서산을 꿈꾸는 노동자 모임', 행서모

"조합원이 소수다 보니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막연한 게 사실이었다. 사실 동희오토에 있는 활동가들은 지역에서 하는 역할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사람들인데 현장에서 소수노조라는 이유로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는 게 뭐랄까, 되게 아까웠다. 동희오토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안 되고 힘든 건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전체 비정규직 운동, 전체 노동조합 운동이 침체되는 거랑 분리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건 지역 운동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해보자 하는 고민을 하다가 행서모 활동을 고민하게 되었다."

행서모는 몇 달씩 지역 운동에 대한 토론과 의제별 소모임 등을 진행했고, 박근혜 퇴진투쟁과 세월호 3주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원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기획들이 제출되었고 그중의 하나가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되기'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에서 안전보건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모였다.



"한 차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여기 모였던 사람들이 '노안활동가모임'를 구성해서 지금 두 번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문제 외에도 3.8 여성의 날 행사나 청소년 대상으로 헌법을 강의하거나 지역에 산업폐기물매립장, 소각장 등이 들어오는 문제가 있어서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같이 대응하고 있다. 또 지역에서 '새움터'라는 노동안전센터를 만들었는데 그 활동에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4주기 추모행사는 '안전사회를 위한 실천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안전과 생명에 관한 의제를 다루는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준비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제가 상근자처럼 활동하고 있어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는 요즘

"개인적으로는 지금 운동의 문제, 위기를 편하게 얘기해보자면 여러 '경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활동가와 대중,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 그렇다면 이런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지역 운동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고, 조직 자체도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행서모는 대표자나 집행국을 두지 않고 여러 팀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개인들 차원에서는 수평적인 연대와 협력을 지향한다. 그런 지향에 맞게 모임을 운영할 생각이다."

최진일 조합원은 충분히 능력과 의지가 있지만, 기존의 노동조합 체계에서는 활동을 펼치기 막막했던 사람들이 지역에서 능력을 펼치는 것을 보면 즐겁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 동희오토에서 현장활동에 공백이 생기는 건 아닌지 물었다.

"동희오토와 지역 활동, 이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솔직히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다. 동희오토는 노동조합 회의도 있고 하니까 논의를 하는데 사실 지금은 답이 안 나온다. 당장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고 주간 연속 2교대와 같이 현장에 쟁점이 있을 때 노동조합에 입장을 내고 선전하는 활동을 하게 될 것 같다."

지역과 현장을 꼭 나눠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지역에서 활동이 활발할수록 현장에서의 활동 시간과 고민이 부족한 문제는 계속 고민이 될것 같아 이점에 관해서 물었다.

"동희오토를 보면 현장 노동자들이 사측에 압도적으로 장악 돼 있다. 그러니 조합원을 조직하고 활동가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다. 아예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민주노조가 있다가 깨진 사업장이라 더 어려운 것도 같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활동가들이 자기랑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거 그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행서모는 굉장한 모순덩어리인 곳인데. 활동 목표나 방식은 활동가와 대중의 경계를 넘어서고,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한다. 그런데 실제로 행서모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피로와 스트레스를 견디며 활동을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좀 더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대중→조합원→간부→활동가→혁명가 이런 단계와 경계를 두는데 사람들은 무조건 단계적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결국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텐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지금까지 활동의 끝은 조직을 만드는 거였다. 그런데 조직을 만들고 나니까 결국엔 여기도 저기도 조직만 다를 뿐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러면 그 조직은 활동력도 힘도 없다. 지금은 우리가 3.8 여성의 날 집회를 한다고 하면 어떤 내용을 준비해서 어떻게 그 운동을 발전시킬 건지가 중요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다. 그런데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면 열심히 뭔가를 했으니 그걸 계기로 모임이나 단체를 만드는 걸로 귀결되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 행서모는 조직을 만드는 데 관심을 크게 두지 않을 거다. 기존에 운동 관행과 질서와 다르게 의제와 가치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면서 틀과 형식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이 기존에 틀을 벗어나서 다른 활동을 고민해보거나 기획해보는 것 자체가 너무 없는 것 같아 이런 고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꿈과 목표는

"사실 동희오토 들어갔을 때 즈음 너무 나대지 말고 그냥 내 주변 사람들만 지키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아서 활동에 있어서나 개인적으로 꿈, 목표 그런 건 없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넘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사회적 자아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개인적 자아가 부딪히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서산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갈 것인지 물었다.

"지금 같이 활동하는 분들과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 비슷한 연배인 활동가들이 땅을 사서 같이 노후 대비를 한다는 얘기도 있더라. 이제 저도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나이인가 싶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렸다.

"행서모가 만들어질 때 종종 하던 이야기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운동이 이 만큼 망했다 그럼 우리가 잘못해서 망한 거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가 밥 먹듯 하는 활동이 잘못된 걸 수도 있다는 의심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고 해왔던 방식에 대해 의심해봐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아차 하면 어떤 문제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돌이켜보면 잘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앞으로 이런 고민을 같이 나누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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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현장과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다 (1)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최진일 조합원 인터뷰 / 2018.04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터>는 지난 2010년부터 3년여간 [노안활동가에게 듣는다] 코너를 통해 전국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개인적인 고민과 꿈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지금 그때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지, 새롭게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펼치고 있는 동지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다시 시작하는 [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는 충남 서산에 있는 동희오토에서 자동차를 만들면서 지역에서 행복한서산을꿈꾸는노동자모임(행서모)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최진일 조합원를 시작으로 연재를시작한다.

높은 노동강도를 견디며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전화나 문자로는 몇 번 이야기 나눴는데 이렇게 뵌건 처음이다.

최진일 조합원은 전날 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민주노총 서태안 위원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터에서,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 만나 다양한 고민과 활동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잘 부탁드린다. 우선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부탁드린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동희오토에서 일하고 있다. 동희오토는 2006년 입사해서 일하다 2008년 해고되고 현대차 본사 앞에서 투쟁하면서 2011년 말에 다시 복직했다."

최진일 조합원은 함께 해고 된 8명의 동료들과 복직 투쟁을 했다.

"회사에서 법적인 해고 사유를 '이력서 허위 기재'라고 했는데, 그거야 회사 주장이고 현장에 투쟁이 있었다. 그때가 피치업이라고 회사가 노동강도를 높이려는 상황이었다. 당시엔 한국노총 조합원이었는데 대의원들 중심으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대응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회사에 난리가 났다. 제가 있던 업체는 폐업하면서 저를 포함한 동료들이 해고됐다. 이후에 민주노총에 가입해서 쭉 복직 투쟁을 했다."

당시 투쟁은 노동강도 저지 투쟁이었지만, 사실상 노조 민주화에 대한 투쟁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는 아주 완강히 저항했다.

"동료들이 투쟁하기 이전에 동희오토에서 민주노조 투쟁을 시작한 게 2004년부터였다. 그때는 조합원도 300∼400명 정도 됐는데 그때도 노조 활동을 하려고 하면 조합원 소속 업체가 폐업되고 다시 업체가 들어오고 그런 게 반복되면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미 민주노조 투쟁이 쉽지 않은 현장인데 여기에서 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때만 해도 동희오토처럼 완성차가 아닌 수십 개의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가 완성차를 만드는 현장이 여기 말고 없었다. 그래서 동희오토는 자본에는 꿈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동희오토라는 현장이 비정규직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감자여서 여기를 왔는데, 와보니까 활동가들이 곳곳에 있었다. (웃음) 입사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회사가 나를 뒷조사하고 해고까지 됐다."

현장에서 소소하지만 소중했던 시간들

언제부터 이른바 현장에 투신해서 운동해야겠다 생각했는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선배들은 등록금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수석 선배라고 시위 중에 돌아가셔서, 입학하자마자 열사 투쟁을 했고 그게 제일 큰 계기였다. 사실 동기들이나 선배들한테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대학에 갔을 때 운동권이 많이 있었으면 나는 안 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만 활동하다 보니 절실했던 게 있었던 것 같다."

노동강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 일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동희오토 가기 전에 이미 제조업 사업장에서 일은 해봤는데 컨베이어 노동은 여기가 처음인 데다 여기는 워낙 노동강도 자체가 높으니까 힘들었다. 게다가 노동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입사했을 때만 해도 UPH라고 한 시간에 자동차가 나오는 속도가 32대였는데 지금은 60대가 나온다. 속도는 2배가 빨라졌는데 당연히 인원이 두 배가 늘지는 않았으니 힘들다. 교대하고 야간에 일하는 것도 처음 입사했을 때는 30대라 버텼는데 이제는 슬슬 힘들어진다."

최진일 조합원은 강도가 높은 일을 하면서도 소소한 활동들을 펼쳐왔다.

"처음엔 제가 일하던 업체 안에서만 알음알음 활동을 했다. 4∼5명이 소소하게 회사의 속셈을 알아야 한다고 (웃음) 속셈학원 모임을 만들고 활동했다. 얼마 하지는 못했는데 그러다 처음 집단행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여성 노동자분이 신입 사원으로 들어왔는데 한 분이 야간에 일 적응을 못 해서 반장이 엄청 갈궜다. 면담 들어가면 울면서 나오고 그래서 마침 저랑 같은 조원이라 쉬는 시간에 조원들이랑 의논을 했고, 한국노총 위원장한테 이야기해서 해결해달라고 하자고 결정해서 10명 정도가 찾아갔다. 그때 한국노총 위원장이 안타깝다고 알겠으니 회사에 이야기하겠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퇴근했는데, 다음날 현장을 가보니 업체 사장이 노발대발 난리를 쳤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문제 해결은 커녕 업체 사장한테 우리가 한 이야기를 고자질했다. 그 뒤로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한국노총이 누구를 위한 노동조합인지 분명이 알게 됐다."

온갖 멸시와 왕따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활동

이른바 현장 활동 주범으로 찍힌 최진일 조합원은 복직 이후에도 지금까지 현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단속을 받고 있다.

"동료들이랑 같이 해고됐을 때 아예 민주노총 조합원은 없었고 현장이 한국노총으로 싹 정리된 상황이었다. 회사는 우리가 복직하기 전까지 현장 관리를 했다. 민주노조 조합원 하고는 아예 말도 못 섞게 단속을 한거다. 물론 업체가 많다 보니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의장 쪽에서 일했던 동지는 관리자들이 대놓고 욕하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만들길래 우리가 모여서 그 업체를 쳐들어가서 관리자랑 푸닥거리를 했던 적도 있다. 관리자들은 우리를 늘 감시하니까 동료들이 말 섞는 것도 못 했다. 밥 먹을 때도 옆에 아무도 앉지를 않았다. 언젠가는 제가 한 번 동료들 옆에 가서 앉아봤는데 한 이틀인가 지나서 한 놈이 따로 얘기 좀 하자더라. 그러더니 하는 말이 미안한데 애들이 네가 옆에 앉아서 정말 불편해한다고 그러지 말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래 그러냐 그랬다."

복직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분위기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막 복직했을 때처럼 긴장이 있는 건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관리는 한다.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회식이 있었다. 회식 때도 다들 제 옆에 오기 힘들어하는데 조금 말이 통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술이 좀 들어갔는지 저한테 사장하고 너무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그러면서 나랑 같이 가서 사장한테 술 한잔 따라주고 오자는 하더라. 저는 됐으니까 너나 갔다 오라고 그래서 혼자 갔는데 다시 오더니 표정이 일그러져서 오더라. 이 친구 딴에는 뭔가
관계를 풀어보려고 한 건데 사장이 진일이랑 친하게지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왔다."

이런 회식 자리도 너무 괴롭고 힘들 것 같았다. 나라면 저란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맞다. 사실 회식에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일부러라도 꼭 갔었는데, 그때는 아예 회사가 회식 때 제가 앉아야 하는 자리를 만들고 옆에 관리자들로 포위시켜 버리기도 했는데 그나마 싸워서 관리자들이 옆에 없는 거다."

큰 전환점을 맞은 산재 인정 투쟁

동희오토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황재민 씨 산재인정 투쟁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환점을 어떻게 마주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현장에서 일하다 사람이 쓰러질 정도면 뭔가 이야기가 들리는데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저희랑 알고 지내는 공장 형님이 정문 앞에 어떤 여성분이 피켓을 들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다음날 동료들이랑 가봤는데 황재민 씨 아내분이었다. 일단 연락처 주고받고 다음에 상황을 들어보니 이미 산재를 한창 진행해서 심사청구가 끝나고 재심사청구를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저희가 노안투쟁이나 산재 관련해서 고민이 적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고 충남 갑을오토택에 있는 안재범 동지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 이훈구 동지께 도움을 요청했다."

동료들은 두 분에게 이번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복직은 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못 하고 있는데, 이것마저 듣는다못하면 민주노조가 있는 게 별 의미 없지 않겠냐. 그래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다시 산재를 신청해서 진행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투쟁하면 회사가 황재민 씨에게 보상하고 산재는 법원에 가서 다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재범 동지와 이훈구 동지가 회사에서 공단에 거짓 자료를 제출하는 등 산재 조사 과정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으니 근로복지공단에 재조사를 요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견을 줬다. 비록 전례는 없지만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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