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에세이] 상식이 된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2016.11

상식이 된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4일제가 미디어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4일제를 도입하면 연평균 2,00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의 벽을 허물어 일자리 창출, -가정 균형, 출산율 제고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시기적으로 수상쩍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제도와 현실 간 격차가 한국사회의 극심한 시간 불평등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있어 미디어상의 주4일제는 포퓰리즘적 정책에 지나지 않는 일종의 판타지일 가능성이 높다. 제도 만능주의식 제도 도입만으로는 시간권리의 구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길은 장시간 노동을 당연함으로 여기는 구조적인 비정상성을 해체하는 데 있다.

 

장면1: “그래도 우리는 평균이에요!” 한 부품업체의 지회장과 인터뷰 때 들었던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균은 월 초과노동시간만 60시간을 넘는데 이는 수요일 빼고 매일 2시간 잔업에 매주 특근을 포 함한 수치다. 평균이란 표현 속에는 장시간 노동이 감내할만한 것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물론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잘알고 있지만 어디인들 안 그렇겠어!”라는 자조가 장시간 노동을 문제 제기의 대상이 아니라 견딜만한 것으로 용인하게 한다.

 

장면2: “그래도 이게 어디야!”라는 아쉬움 속 만족감, “숨 좀 쉴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 심지어 이제야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같다는 행복감까지 뜻밖의 답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한 공사와의 인터뷰 시 직원들이 내놓은 답변이다. 만족감과 안도감, 감사함과 자긍심 또는 성취감이나 우월감도 엿볼 수 있던 인터뷰였다. 직원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한 것은 리프레시 휴가제, 연차휴가 일부의 앞뒤로 주말을 더 해 10일 가량을 연속해서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임에도 휴가의 연속 사용을 감사와 자긍심으로 언어화하는 것은 우리의 무효화된권리 상태를 반증하는 양상이라고 본다.

 

특정한 양상이 반복되면 하나의 패턴이 생겨나고 나아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질서로 구축된다는 앙리 르페브르의 표현대로 당연하지 않은 것임에도 그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상식으로 여겨지고 일종의 자연 상태를 구축하게 마련이다. 장면1과 장면2는 비상식적인 장시간 노동이 자연화된 사회의 일면들이다. 또한, 제도와 현실간의 격차가 상당히 큼에도 그 격차 자체가 일상이 된 사회, 비당연함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사회의 일상 풍경일 것이다.

 

사회 구조와 감정 구조는 긴밀하게 연동된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들은 그 사회의 감정 상태를 드러낼 것이다. “다 그래, 당연한 거 아냐!”, “다들 그러는데 어쩌겠어!”라는 냉소 섞인 탄식,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라는 비관적인 태도 또는 유별나게 왜 그래!”라는 핀잔을 듣지 않는 수준에서 장시간 노동을 회피하는 전략, 역설적으로 자유시간을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일터로 회귀하는 모습까지! 시간의 권리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의 웃픈 감정 상태들 아닐까 싶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유 시간의 가능성과 희망을 최대화하는 방향의 삶을 선택하고 실천하려는 표현들보다는 바람과 기대를 스스로 낮춤으로써 차라리 제약의 테두리(장시간 노동 체제)적응하는 게 낫다는 순응주의적 표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게 평균이에요라는 표현은 장시간 노동의 박탈 효과가 얼마나 고약한지 인지하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 또는 자유 시간이 박탈됐다는 감각이 무뎌진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장시간 노동에 따른 박탈 효과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은 자유 시간의 폭을 현저히 축소시켜 골병과 과로사의 위험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세계와의 교류 가능성과 상상의 가능성을 떨어트려 다르게존재할 가능성을 박탈한다.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가족을 챙기는 일련의 방식들이 유독 상품 집약적인 서비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시간 박탈감을 최대한 보상받으려는 몸부림 또는 박탈을 최소화하려는 회피 전략의 결과들이다.

 

낡은 질서에 덧대진 새로운 테크닉들

시대나 사회마다 상식의 범주들이 있다. 상식의 범주들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생산된다. 이를테면 발전국가 시기의 인간형인 근면 주체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잘살아 보세와 같은 구호, 공장 새마을운동의 깃발, 근면 정신 교육, 모범 근로자 상, 사회정화프레임 등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런 근면 주체는 희생(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도 내달릴 수 있도록 동원된 주체 상이었다. 그런데 상식의 범주는 시대나 사회의 변동에 따라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그렇지만 장시간 노동이라는 낡은 사물의 질서, 낡은 존재의 질서, 낡은 사회의 질서가 해체되지 않은 채 비정상 상태는 더욱 고착되고 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은 과거 발전주의의 유물만은 아니다. 새로운 신자유주의 장치들은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또는 자기 통치의 방식으로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성을 재생산하고 있다. 현재의 과로사는 발전주의적 폭력과 신자유주의적 폭력이 중첩된 필연적 산물이다.

 

지난 한 해 직장인의 공감을 얻은 신조어 1위인 메신저 감옥이라는 표현처럼, 스마트폰 이후 사람들은 퇴근하더라도 일상이 일의 요소에 의해 간섭받을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고 있다. 레이그 램버트는 이를 정보 시대의 그림자 노동이라 일컫는다. 일상에의 업무 간섭정도가 높아진 만큼 스트레스가 증가했음은 물론 개인의 자유 시간이나 여가가 더욱 단절적이고 파편화되리라 예측 할 수 있다. 이는 길이의 관점을 넘어 배치의 관점에서 시간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지점이자 기술의 자본주의적(신자유주의적) 사용을 공동선의 관점에서 문제 삼아야 하는 지점이다.

 

한편, 성과 장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개발에 더욱 신경쓰고, 자기평가에 엄격하고, 자기책임을 다하도록 내몰고 있다. 일명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형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규율화된 근면 주체처럼 일터를 벗어난다고 해서 성과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진 않는다. 일터 밖 일상에서도 자기분석-자기개발-자기평가-자기책임을 더욱 경쟁적으로 알아서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존재다. 자기계발이란 이름의 주술은 한 톨의 자유시간까지도 경쟁력을 드높이는 연료로 태워져야함을 주문한다. 우리는 신기술의 파괴적 효과와 모든 문제를 개인 내부의 문제로 환원하는 자기 통치 장치들의 문제가 있는 요소들이 어떠한 태클 없이 일터와 일상에 파고들어 장시간 노동을 재생산하는 지점을 가시화하고 그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

 

비정상 상태에서 다른 삶을 발명한다는 건!

장시간 노동에 대한 개인의 해법은 다양하다. 누구는 시간 관리를 더욱 효율화하는 방식을, 누구는 시간 절약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을, 누구는 가사·육아·간병 등을 외주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상품 서비스에의 의존성을 높일 뿐이다. 시간 권리의 촉진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상품 서비스에 기댄개별적 해법들은 소비자본주의의 자장에서 맴돌게 할 뿐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의 테두리를 문제 삼지 못한다.

 

공동선의 관점에서 시간 권리를 지향하는 언어들이 어느 사회, 어느 시기보다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다. 상품소비에 기댄 개별화된 방식이나 제도 만능주의식 제도 도입은 비정상성의 덩어리를 해체하는 데 한계가 자명하다. 물론 비정상성을 떠받치는 얽힌 고리들을 끊어내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비정상성은 초자연적 힘으로 저절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식 영웅이 나타나 악의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비정상의 해체가 내재한 필연도 아니다. 비정상성의 얽힌 고리들의 배치를 하나씩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여기에는 1) 앞서 언급했던 신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와 경쟁적 성과 장치의 반인권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뿌리 깊게 베어 일상 속 알게 모르게 관통하고 있는 기존의 노동 규범들은 일상의 언어, 관계의 방식, 성공의 재현, 문화적 형태로 유통·소비되면서 삶의 폭, 삶의 방식, 상상의 가능성을 옥죈다. 장기적으로는 기존 규범, 기존 판단 기준, 기존 인식 틀의 당연함을 낯설게 하고 비틀 필요가 있다. 3) 다른 상상/기획을 희석하고 포위해 버리는 담론들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반복 출몰해 장시간 노동을 자연화한다. 이에 대항하는 언어를 발명하는 작업 또한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노예제살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살인같은 공격 화법을 동원해 사회 구조적인 자유 시간의 박탈을 폭력으로 간주해 그 폭력 양상을 드러내는 작업에 서부터 게으를 권리저녁 있는 삶같이 다른 삶의 선택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이 유용할 것이다. 4) 장시간 노동을 존속시키고 있는 큰기둥인 임금 체계의 부적절함을 개혁하는 것을 포함해 새로운 소득 구조를 요구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5) 이와 함께 제도 차원에서는 장시간 노동을 대놓고조장하는 고질적인 제도들을 제거하고 제도의 현실성을 높이는 작업도 요구된다. 그렇지 않는다면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성을 방기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는 과로사의 행렬을 막을 수 없다.

 

상식으로 굳어진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아마도 혹자의 말처럼 이교도가 되어야 할 각오” 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다른 기획, 다른 욕망, 다른 실천, 다른 삶을 발명한다는 것은 아마도밟아 본 적 없는 고향, 가나안 땅으로 달려가려는 파라오 체제의 히브리인들이 품은 열망만큼이나 두려움을 수반하고 믿음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게 사는 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처럼 현재의 비정상 상태를 상대화하는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일 수 있다. 일종의 자기에 대한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비정상성의 당연함을 비 당연시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지도록 연결할 차례다.

 

제도 차원의 시간 단축이 시간 권리를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시간 단축은 자유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한 조건 중 하나다. 단순히 시간 단축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쉼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윌터 브루그만의 표현을 빌자면, 쉼은 그 자체로 자유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신자유주의적 장시간 노동체제에 맞선 저항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주체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쉼을 향한 감각과 역량을 자극·교육해야 한다. ‘개미와 베짱이류의 근면 이데올로기만을 반복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상상/욕망/경험/실천/존재할 가능성을 발명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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