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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에세이]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2015.9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신경아 노동시간센터 회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인간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일까? 내 상상엔 이렇게들 답할 것 같다. 초등학생 :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다.” 중학생 : “일하기 싫다.” 고등학생 : “글쎄 안 하면 좋겠지만, 조금만 하고 놀고 싶다.” 대학생 : “나도 일할 수 있을까?” 취업준비생 : “일만 하게 해준다면 24시간 한다.” 직장인 : “퇴근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하면 소원이 없겠다.” 이 질문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 세기 전 ‘노동’에 관심을 가졌던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일치된 답변을 했다. 태양의 도시』의 저자인 16세기 사상가 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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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에세이]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2015.9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신경아 노동시간센터 회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인간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일까? 내 상상엔 이렇게들 답할 것 같다.

 

초등학생 :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다.”
중학생 : “일하기 싫다.”
고등학생 : “글쎄 안 하면 좋겠지만, 조금만 하고 놀고 싶다.”
대학생 : “나도 일할 수 있을까?”
취업준비생 : “일만 하게 해준다면 24시간 한다.”
직장인 : “퇴근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하면 소원이 없겠다.”

 

이 질문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 세기 전 ‘노동’에 관심을 가졌던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일치된 답변을 했다. 태양의 도시』의 저자인 16세기 사상가 캄파넬라는 인간에게 적당한 노동시간은 하루 5시간 노동이라고 썼다. 15세기 철학자·정치가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인간에게 적당한 노동은 오전 3시간과 오후 3시간, 합해서 하루 6시간 노동이라고 보았다. 당신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고 싶은가? 그리고 실제로 몇 시간 일하는가? 시간제 근무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하루 8시간 이상, 10시간에서 12시간 일하지 않을까? 물론 그 이상 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최근 인터뷰한 여러 기업에서 실제 근무시간은 ‘나인 투 나인(9 to 9)',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이 가장 많았다.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바치는 셈이다.‘나인 투 나인’이 왜 나쁜가? 열심히 오래 일해서 승진하고 월급도 많아져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낡은 차도 바꾸면 좋은 삶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다. 허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긴 시간 노동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건강, 가족과의 저녁식사, 아이들의 웃음소리, 친구, 영화, 산책, 운동, 여행, 늦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 읽기, 광화문 집회 가기... 생각해 보니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노동의식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이 오늘날처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불과 2~3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어땠을까? 기독교 신화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낙원,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노여움을  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아담과 이브는 “땀 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먹을 수 없으리라”는 저주의 메시지를 받는다. 이처럼 서구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기독교 사상에서 노동은 신의 처벌이었다. 중세시대까지 서구에서 노동은 사회적 하층계급의 의무였다. 노동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오죽하면 중세의 귀족들이 글씨 못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글씨를 쓰느라 모양이 망가진 손을 가진 이를 경멸했을까. 생계를 위해 글씨를 써야했던 사람들은 낮은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자. 그들이야말로 선택받은 계급이었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농사나 수공업에서 면제되었고 글을 읽을 자유와 책임이 주어졌다. 노동은 노비와 농민, 여성의 몫이었다. 한 예로,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 김만중은 양반 가문이었지만 벼슬을 그만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의 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과거에 급제한 양반들은 관직을 얻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양반계급 남성들은 과거 준비를 하며 일생을 보냈고 먹고 살기 위한 농사와 길쌈, 수공업은 농민과 여성과 수공업자 그리고 노비들이 수행했다.

 

노동이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자 권리가 된 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혁명을 거치며 직업은 신이 내려준 소명(calling)이 되었고 부(富)는 근면의 표식으로 신의 선택을 예고하는 기호(a sign)가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고아나 가난뱅이, 알콜 중독자들을 가둬 강제노동을 시키는 구빈원(救貧院)에서부터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가 될 권리를 부여받으며 노동자가 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우리 안의 일중독 DNA, 다른 욕구를 억압한다

 

한국인들은 오래 일한다.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휴가가 적어 연간 노동일수가 많고 1일 노동시간도 길다. 또 노동을 그만두는 시점, 최종 은퇴연령도 높다. 지난 세기말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퇴직 연령을 높여 연금 수급시점을 늦추려는 법안이 통과 되면서 노조를 중심으로 강한 저항이 있었던 데 비해, 한국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퇴직을 늦추고 싶어 한다. 70살까지는 일하고 싶다는 것이 내가 만나본 중고령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다.

 

한국인들이 장시간 노동지향의 DNA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 산업화의 산물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적 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길고 긴 레이스에서 쉼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 결과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빈곤국에서 아시아의 용(龍)이 되었고 세계적인 대기업도 몇 개 등장했다. 인터뷰하며 만난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이 길고 늘 피곤하며, 가족과 함께하거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나 승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찬성하는 사람보다는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도 걱정스럽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만난 한 여교사는 자신들은 오후 4시면 퇴근해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간 궁금했다. ‘4시에 퇴근해서 뭘 하지?’ 반대로 그녀는 한국에서는 7~8시에 퇴근한다는 나의 말(더 늦게 퇴근하는 곳도 많지만 말하기가 창피했다)을 듣고 물었다. “그 시간까지 회사에서 뭘 하나?” 일과 가족을 양립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부모휴가 등 가족돌봄 시간을 넉넉히 준다는 스웨덴과 핀란드, 노르웨이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수많은 공원, 산책 나온 아이들과 부모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여러 놀잇감이었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수많은 결사체들이었다. 스웨덴에서는 은퇴한 노인들도 서너 개의 사회적·정치적 모임에 소속해 있으며 토론과 정치참여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을 비롯한 EU 국가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적 참여를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몇 해 전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EU와 같은 설문조사를 했는데, ‘노동시간이 너무 길고 가족생활시간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많았지만, ‘사회 참여를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매우 적었다. 사회 참여에 대한 욕구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휴식과 가족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활동에 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너무 긴 노동시간은 인간의 내면에서 다양한 욕구가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짧아진 노동시간이 가져다 준 삶의 변화

 

노동시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나는 남성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남성들의 구술 생애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어떻게 일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의 남성성과 가족, 젠더관계에 가져온 변화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때 인터뷰한 내용을 잠시 소개한다.

 

Q. (과거에) 선생님은 일요일 날 쉬실 때에 보통 뭐하셨습니까?

박영수(가명) : 쉴 때 그때는 주로 자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 전에는 주로 잠을 많이 잤어요. 피곤하니까... 주야간 하고 오면. 그것도 야근, 며칠씩 일주일 내내 야근할 때가 있어요. 그리되면 그 다음 일요일 날은 꼼짝을 못해요. 그냥 하루 죙-일 잤어요.

 

Q. 직장을 바꾸신 후, 좋은 점이랄까요, 그런 게 있으십니까?

박영수(가명) :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내가 책을 볼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금요일 날 5일 근무인데도, 우리는 한 십 년전부터 5일 근무를 했어요. 저는 금요일 한, 세시 되면 와요, 집에. 한가하니까. 그 대신 그 전에 일은 다해놓고 오죠.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아요. 근데 저 사람(부인) 같은 경우 토요일 오전근무까지 하거든요. 그러니까 저하고 시간이 안 맞아요. 어딜 갈라면 금요일 날 오후에 가면 딱 좋은데, 그럼 한 이삼일 쉬잖아요. 저 사람은 토요일 날 오전까지 근무를 하니까 오후 돼야 시간이 나거든요. 저 는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아요. 책도 볼 수 있고 밭에 정원에 쑥도 캘 수 있고, 나물도 있으니까. 가을 같은 때 밤도 딸 수 있고. 그게 한 가지가 제일 좋아요.

 

일요일만 되면 피곤에 지친 몸을 누이고 밀린 잠을자는 일상과, 주 5일제 근무로 책을 읽고 운동하고 들로 나가는 삶에 대한 진술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다른 정서를 담고 있다. 때로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 하는 지치고 피곤한 모습과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을 쉬는 덕분에 책도 읽고 자연도 즐기는 서정적인 인간의 모습,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인터뷰에 응한 박영수 씨는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다"고 되풀이했다. 일에서 벗어난 ‘시간’이 자기 삶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갖는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일중독’은 일이 곧 자아의 중심이며 일 이외의 다른 삶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 일이 없어지면 자신의 삶도 끝난다고 느끼는 의식상의 특징을 말한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 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일중독을 보편적 정서로 만들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일중독은 좋은 삶이라는 20세기적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00여 년전 토마스 모어나 캄파넬라는 어떻게 5~6 시간 노동을 주장했을까? 생산과 배분이 적절히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부의 지나친 불균형을 막을 수 있고 덕분에 사람들은 너무 오래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은 사회적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속의 일중독 DNA가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시간 단축요구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