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96·97 총파업이 2015 총파업에게 /2015.5

96·97 총파업이 2015 총파업에게


선전위원 재현


4월 24일 재벌 배불리기에 맞서 노동자 서민 살리기 총파업에 민주노총 조합원 26만이 참가했다. 총파업 선포에 앞서 집회 무대를 향해 민주노총 깃발이 입장하는데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은 전율을 느꼈다. 96·97 총파업을 경험했던 선배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96년엔 구로의 한 전자산업 사업장에서 조합원으로, 19년이 지난 지금은 안양의 컴퓨터를 만드는 주연테크 사업장에서 지회장으로 총파업을 조직하는 김명신 지회장을 만나서 96·97 총파업에 이어 2015 총파업을 맞이하는 감회를 들어보았다.


1996년 12월 26일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사진  : 1996-1997 날치기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 [출처 보건의료노조]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1996년 12월 26일.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아침이었는데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위해 삼삼오오 모이고 있다는 거예요. 결국, 날치기로 법이 통과됐는데 그때 민주노총 지도부가 지금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을 선언한다는 지침을 내리는 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1996년 당시 한국사회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 1만 불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노동자 서민들은 세계 4위의 중대재해율을 기록하는 현장에서 연간 2,50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삼 정부와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12월 26일 새벽 단 6분 만에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 시켰다.

“노동법 개정안엔 정리해고뿐만 아니라 탄력적 변형 근로 형태 도입 등 개악 안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정리해고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어요. 지금도 정리해고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는지 다 알잖아요. 그래서 당시에 ‘이건 무조건 파업이다’ 이런 정서가 현장에 있었어요.”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민주노총은 자동차, 금속, 현총련, 전문노련 등 현장에 파업 지침을 내렸다. 파업이 어려운 전교조의 경우 단식수업, 화물노련은 구간별 안전운행 등의 투쟁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12월 26일 85개 노조, 14만 2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이후 투쟁을 확대하면서 12월 31일엔 연인원 100만 명을 기록했다.

“매일 명동성당으로 모였어요. 파업 이후 수배가 떨어진 지도부들이 명동성당에 있었거든요. 제가 그때는 결혼 전이라 부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교회를 다니는 집이라 12월 31일엔 꼭 집에 모여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려야 했어요.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배 째라는 심정으로 부모님께 집에 못 간다고 전화했던 기억이 있어요. 경찰이 명동 성당을 침탈한다고 하는데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더라고요.”


사진 : 1996년 12월 30일 노동법 개정 총파업 당시 명동 성당 집회 사진 [출처 금속노조]


1997년 1월 18일 그때 고비만 넘겼더라면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자 사회운동단체들도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를 구성하여 투쟁에 동참했다. 80% 넘는 국민들도 날치기 통과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해가 넘어가고 1997년 민주노총의 2단계 투쟁지침에 따라 언론, 사무, 전문, 서비스직 노조로 투쟁 단위들이 확대됐고 그 결과 총 169만 5천여 명이 파업투쟁 참가했다. 당시 한국노총도 42만 여 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함께했다. 한편, 파업이 길어지자 민주노총 지도부는 1997년 1월 18일을 기점으로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요 파업 전환한다고 했을 때 불만이 대단히 많았죠. 파업이 길어지면서 참가 인원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는데, 우리 현장만 해도 언론에서 정치파업이다 불법파업이다 그러면서 무섭게 몰아치니까 조합원들이 긴장하고 집회에 못 나가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니 지도부 입장에서도 더는 조합원들이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흔히 조합 활동 하다 보면 지도부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는데……. 지나고 나니까 굉장히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때 그 고비만 넘고 갔더라면, 임·단협 기간도 맞물리면서 좋은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

수요파업 전환 이후 민주노총은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했고 2월 17일 김영삼 정권이 국민들에게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면서 국면이 전환되었다. 3월 11일 임시국회에선 여·야간 합의로 날치기 법안을 폐지하고 정리해고제 시행시기를 2년 유예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비판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땐 잘 싸웠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싸웠는데도 근본적으로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컸던 게 사실이에요. 정리해고가 가진 여파가 굉장했죠. 다만 그래도 전노협 시절엔 합법 노조가 아니니까 매일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많은 규모가 모여 집회하기도 어려웠는데 그때 투쟁의 성과로 민주노총이 합법화 되고, 조합원들이 많이 모여서 투쟁할 수 있었고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봐요.”

96·97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이 단사·업종·지역을 넘어 ‘노동악법 전면 무효화’ 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단결했던 건국 이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정치파업이었다. 더 나아가 당시 투쟁은 1980년 이후 세계 노동운동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투쟁이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투쟁을 통해 조직력을 확대했고, 산별노조 건설의 토대 구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 전선에서 노동자 정치세력의 부재는 ‘단 한 명이라도 노동자 국회의원이 국회에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말을 낳았고 총파업을 마무리한 민주노총은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 결과 민주노총 초대 지도부였던 권영길 위원장이 국민승리 21 대선후보로 출마했다. 이러한 흐름은 투쟁의 긍정적 의미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96·97 총파업을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뼈아픈 평가를 남겼다.

“권영길 위원장이 대선에 나왔잖아요. 그땐 이러려고 파업 접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당시 일어나라 코리아 의제에 대해서도 비판의식이 있었어요. 민주노동당 창당 때도 시선이 좋지만은 않았고요. 여전히 분단국가인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라고 하면 빨갱이 정당이라는 선입견이 너무 강하니까 기대보다 염려와 우려가 컸죠. 그래도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가입은 했어요.

권영길 위원장 사퇴 이후 민주노총 직무대행 집행부는 1998년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에 합의했다. 이후 직무대행 집행부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비대위는 정리해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정치적 선언만 있었을 뿐 폐기를 위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이후 IMF 외환위기, 신자유주의 공세에 따라 전국 곳곳 현장에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벌어졌다. 그 결과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에 따른 정리해고와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파업부터 노무현 정권 비정규직 악법, 한·미 FTA 체결, 이명박 정권 타임오프 날치기 통과,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77일 옥쇄파업, 박근혜 정권 철도 민영화 저지 파업까지 19년이 흐르는 동안 노동자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19년 전 보다 지금이 더 절박한 상황이라고 봐요

“워낙 많이 밀려왔어요. 타임오프 때였나. 그때도 여의도에서 집회하고 있었는데 민주당에서 결국 합의했다는 거예요. 당시 민주노총 직무대행은 잠적하고. 또 민주노총이 매년 총파업을 선언하지 않은 해가 없었는데 매번 뻥 파업 하면서 잘못한 것도 많고요. 그래도 지금 모두가 96·97 총파업 때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파업을 조직하고는 있는데 안타깝게 현장엔 별로 긴장감이 없는 것 같아요. 총파업이 왜 필요한지 교육도 하고 그러는데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삶이랑 파업이 와 닿지 않은가 봐요. 파업해야 한다니까 하지 뭐 그런 정서 같아요. 현차 같이 큰 노조도 안 하는데 우리 같이 작은 사업장이 파업해봐야 효과도 없고 현장에서 탄압만 받을 텐데 왜 하느냐는 이야기도 많고요.”

금속노조가 4.24 4시간 파업 지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 지부는 파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많은 내홍이 있었다. 그러나 파업 준비 기간도 부족하고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도 민주노총을 비롯해 빈민, 장애인 등 민중들이 함께 ‘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 더 많은 비정규직’ 을 노린 박근혜 정권의 노동자 죽이기 정책에 맞서 4.24 총파업 투쟁을 벌여냈다.

“저희도 4시간 파업을 결의했어요. 5월 1일 노동절에도 최대한 집중하자는 분위기이고요. 세월호 참사 정국에 성완종 리스트 파문까지 지금은 분명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이니 잘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누가 나오든 나오지 않던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갈 길을 가자. 집회는 무조건 가야 한다고 얘기해요. 만일 10,000명이 오기로 한 집회에 나 하나 안가면 9,999명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집회는 무조건 많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게 노동자의 힘이거든요.”

12명 소수의 조합이지만 자본과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멈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주연테크 동지들을 비롯해 80만 민주노총 조합원 모두가 96·97 총파업의 교훈을 잊지 말고 단결해서 위력적인 2015 총파업 투쟁을 열어젖히길 기대한다.

* 기사에 싣지는 못했지만 이번 인터뷰에 큰 도움 주신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김학철 조직부장, 금속노조 경기지부 주연테크지회 안준민 노안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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