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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대행의사가 건강(?)한 노동자를 만나는 방식 / 2014.6 대행의사가 건강(?)한 노동자를 만나는 방식 - 건강노동자 역설, 그리고 노동시간센터 - 류현철 회원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양팔을 가로질러 팔짱부터 끼었다. 상체를 쑤욱 뒤로 젖히고 앉는 바람에 의자의 등판은 한껏 뒤로 젖혀지고 엉덩이는 아슬아슬하게 의자 끝에 걸쳐져 있다. 낯선 방문자에 대한 심드렁함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듯, 그는 기름때가 완연한 작업복 바지에 다소 유행이 지난 안전화(분명 안전화에도 유행도 스타일도 있다!)로 마감된 단단해 보이는 하체의 한쪽 다리만 길게 뻗은 채 쩍 벌리고 앉는다. 짐짓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삐딱해진 시선은 이 바닥에서는 나름 젊은 축에 속하는 그래서 더욱 시답잖아 보이는 의사양반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고, 잠깐 왼쪽 가슴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는 이름표에 머물렀다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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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대행의사가 건강(?)한 노동자를 만나는 방식 / 2014.6

대행의사가 건강(?)한 노동자를 만나는 방식
- 건강노동자 역설, 그리고 노동시간센터 -


류현철 회원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양팔을 가로질러 팔짱부터 끼었다. 상체를 쑤욱 뒤로 젖히고 앉는  바람에 의자의 등판은 한껏 뒤로 젖혀지고 엉덩이는 아슬아슬하게 의자 끝에 걸쳐져 있다. 낯선 방문자에 대한 심드렁함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듯, 그는 기름때가 완연한 작업복 바지에 다소 유행이 지난 안전화(분명 안전화에도 유행도 스타일도 있다!)로 마감된 단단해 보이는 하체의 한쪽 다리만 길게 뻗은 채 쩍 벌리고 앉는다. 짐짓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삐딱해진 시선은 이 바닥에서는 나름 젊은 축에 속하는 그래서 더욱 시답잖아 보이는 의사양반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고, 잠깐 왼쪽 가슴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는 이름표에 머물렀다 떠나지만 의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법은 없다. 공장 사무실 한켠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긴장.
 
나는 의자를 바싹 끌어당기고 상체를 그에게 훅 깊숙이 기울이며 갑작스런 인파이팅을 시도하듯 다가가 대화를 시작한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져야 한다. 공장의 배경 소음을 이겨내기 위해서, 내밀한 개인의 건강 문제들을 마냥 떠들다가 주변 동료들을 미필적 고의의 정보유출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싹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시작이 된다. ‘약이나 처방은 주지도 않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운동하라는 식상한 이야기나 할 테지’ 싶어 일부러 비딱하게 앉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대략 그렇게 회사에 6일도, 6주도 아닌, 6개월 만에 방문한 보건관리대행 의사와 건강(?)한 노동자와의 첫 상담은 시작된다.

 

최초 대면의 긴장은 바싹 거리를 좁혀 나눈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와 그가 하는 절단업무, 그 중 플라즈마 절단이라는 비교적 생소한 자기 일에 대해 풍월을 읊을 줄 아는 의사에 대한 신기함 등으로 조금씩 풀어져 갔다. 45세 남성 노동자인 그와의 최초 면담을 기록하는 나의 방식은 이랬다.

 

 

2014년 2월 입사, 플라즈마 절단, 절단 경력 14년
과거력 (-), 가족력 (-), 귀마개/마스크/보안경 (+/?/+)
흡연 1갑반 20세부터, 음주 (-), 운동 (-)
08:00-20:00, 월-금, 토 08:00-17:00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해서 오후 8시에 퇴근하는 일과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어지며, 토요일에는 그나마 오후 5시에 업무가 끝난다. 평일 식사 및 휴식시간을 빼도 하루에 10시간, 토요일은 8시간 근무, 주당 58시간이 그의 노동시간이다. 


2011년 OECD 통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90시간이다. 이것만 해도 OECD 회원국 2위로 OECD 회원국 평균 연간 노동시간인 1,765시간보다 325시간 이상 길다. OECD 노동자들보다 평균 8.1주 이상 일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조차도 도통 믿지 못하겠다. 지난주 근무시간이 어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철야를 2번 했단다. 교대근무 얘기는 없었는데 철야라니요? 오전 8시에 근무를 시작해서 밤을 꼬박 새워 철야근무를 하고 새벽에 2~3시간 잠을 잔 후 다음날 오후 5시까지 근무를 한단다. 33시간 동안 회사에 있는 것이다. 비록 그의 업무가 지속적인 라인작업은 아니고 기계장비를 운용하는 것이고 잠시도 일손을 놓을 수 없는 업무는 아니라지만... 그렇게 일을 한 후 오후 5시에 퇴근하고 다음날 오전 8시에 출근한 그는 다시 철야근무를 했다. 지난주에 그렇게 하고 오늘도 철야근무를 할지 모른다. 맙소사!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 최근 늘어난 물량 탓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했다. 그렇게 일을 하는 그는 아직 건강(?)하다. 이 회사에 오면서 받은 배치 전 건강진단에서도 특이한 문제는 없었고, 이제껏 건강문제로 병원 신세를 진적도 없고 오늘 측정한 혈압도 정상이었으니 “거보슈”라며 뿌듯해 한다.

 

‘건강노동자 효과’ 라는 것이 있다. 직업성 질환 연구에서 최초로 관찰된 현상으로 종종 노동자들은 일반 인구보다 전체 사망률이 더 낮게 제시되는데, 그 까닭은 심각하게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은 고용에서 배제되거나 일찍 퇴직하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당최 견뎌 내기 어려운 조건의 일이라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만 남아있게 되는 현상이 거꾸로 그 일을 해도 건강상 악영향은 없거나 오히려 건강에 이롭기까지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일을 해도 그는 괜찮고 건강하기까지 한 것이 아니라, 그나마 건강한 탓에 이렇게 일을 버티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건강할 수 있을까?

 

“아휴, 그래도 철야한 다음날 아침 먹고 난 이후부터는 몽롱하지~ ...오후가 되면 정신이 부웅 떠서 일하는 것 같다니까요~”


그는 건강하다. 아직까지는... 첫 상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이완시켰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일하시다가는 언제 몸이 망가질지 모른다는 막연한(장시간 노동의 건강문제를 열심히 의사스럽게 이야기한다 해도 결국은 막연한) 이야기밖에 못 한 대행의사에게 ‘노동시간센터’가 자못 간절한 이유이다. 그의 건강이 무너지고 일상이 더 무너지기 전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