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에세이] 플랫폼 노동시대, 크로노토프는 누가 쓰는가 /2017.7

플랫폼[각주:1] 노동시대, 크로노토프는 누가 쓰는가



정글 노동시간센터 회원


“아버지께서 들판을 가로질러 익사한 소년의 시신을 운반해오셨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몬태나주, 마일즈시티>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은 우리는 많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소년은 누구이며 어쩌다 익사했나?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과거와 미래, 즉 ‘시간’에 관한 질문이다. 또 우리는 저 짤막한 문장에서 들판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문장 바깥에서는 소년이 익사한 물웅덩이도 보인다.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바흐친은 이렇게 문학 속에서 나타나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 응축된 내적 연관을 ‘크로노토프(Chronotope)’라 불렀다. 문학은 현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대신 시간과 공간을 지시하는 문장을 통해 읽는 이에게 인식되고 재구성되어 가시화된다. 그래서 크로노토프는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과 입장을 통해 그려지는 현실, ‘해석되고 구성된 동시대성’이라 바흐친은 말했다.


현실을 비추는 문학의 용어를 다시 현실로 가져와보자. 개인은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개개의 크로노토프들은 서로 갈등하고 포용하면서 공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개개의 크로노토프를 통해 사회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크로노토프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지면에서 주목하는 거대한 크로노토프는 ‘플랫폼’이며, 개개의 서사들은 바로 ‘플랫폼 노동자’다.


오늘날 플랫폼은 주로 스마트폰 앱으로 매개된다. 앱을 통해 남는 방, 자동차, 장비를 빌려줬다. 이것은 일종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간성이 더해졌다. 플랫폼 안으로 서사의 주체인 개인이 대거 들어왔다. 에어비앤비, 우버, 메카니컬터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카카오 드라이버, 배달의민족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현실화된 미래의 노동중개 형태인 플랫폼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제시한다. 미래를 스스로 일구고 싶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창업의 무한한 대지가 디지털 공간에 펼쳐진다. 이런 형태의 독립고용노동은 최고의 임금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다. 분초, 비트 단위로 일할 있다.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번다.’ 어느 배달업체가 (실제로는 자영업자 지위를 가진) 배달원을 구인하며 쓴 문구다. 플랫폼 안으로 수많은 개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각자라고 선전한다. 하지만 이 서사들이 모인 전체 크로노토프의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매사추세츠대 제럴드 프리드먼에 따르면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시적 고용형태는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2008년 등 경제적으로 열악한 시기에 급속도로 증가했다. 특히 2006년 이후 미국 내 고용의 순증가는 모두 대체근로의 형태였다. 즉, 이런 고용관계의 변화는 노동자의 선호 때문이 아닌 사용자의 선호 때문이며 플랫폼 노동의 증가는 이런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플랫폼 노동이 이전의 한시적 고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속도’다. 이전에는 십분 만에 고용하고, 십분 만에 해고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를 가능케 한다. 이럴 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필연적으로 생긴다. 느린 사회적 합의과정을 요하는 법제도가 그렇고 느린 진화과정을 수반하는 노동자의 신체가 그렇다.


법제도를 먼저 생각해보자. 이미 한국에서도 배달업을 중심으로 플랫폼 노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판자들은 말한다. 고용의 파편화는 사회계약의 폐지다. 사회보장제도의 기원은 노동력 재생산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의 신체 보호가 제도화 되었다. 따라서 사회권이 보장되고 노동은 건강, 안전, 존엄이 보장되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총론은 그럴듯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효과적일까? 렌느1대학 조세파 디링제는 이런 식의 접근은 도급인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겠다는 사회법의 입법 목적을 약화시키며,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희석시킴으로써 오히려 개별 법 적용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보다 삭막한 우리 현실에서는 플랫폼 노동이 단순히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 특고’다. 그러나 단순히 ‘디지털 특고’라는 틀로 본다면 플랫폼 노동 안에 있는 여러 고용관계의 차이가 은폐된다. (이 논의는 이 지면에서는 논외로 한다.)


영국의 우버(uber)[각주:2] 노동자들의 경우를 보자. 영국일반노조는 우버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고 이에 승소해 우버 노동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최저임금 보장, 유급연가 사용권과 노동시간 제한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는 우버라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버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인격권이 종속됐으며, 이는 우버에 사용자성을 부과하는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우버가 사용자인가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노동자의 노동은 고객을 향한다. 노동제공의 조건은 플랫폼이 정한다. 노동자의 급여는 고객이 지불한다. 플랫폼과 고객 모두 별점을 통해 노동자를 감독한다. 누가 사용자인가? 과연 한국의 법체계는 이런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우버 노동자의 소송이 시사하는 또 다른 면은 플랫폼 노동의 대표적 문제가 긴 노동시간과 낮은 소득수준이라는 것이다. 우버는 택시기사에 비해 우버 노동자의 소득수준이 높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총매출이다. 연료비, 보험료, 차량유지비를 제하면 소위 남는 게 없다. 하지만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저시급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일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플랫폼 배달노동자들도 다르지 않다.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번다.’는 선전은 살아갈 정도로 벌려면 죽을 만큼 일하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신체의 문제, 즉 산업보건의 문제는 어떤가? 하트퍼드셔대 오슐러 휴스와 사이먼 조이스는 이렇게 정리한다. 플랫폼 노동자는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 부적절한 근무환경에서 장기간 일한다. 직업적인 건강악화는 개인이 책임진다. 부적절한 도구나 안전장비, 독성 화학물질, 위험한 근무환경, 훈련 및 감독 부족 등에 의한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뿐만 아니다. 일의 불안정성 및 예측 불가능성은 스트레스를 증대시킨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못해 심리 사회적 위기에 빠진다. 마감은 분 단위며, 임금도 그에 못지않게 초저가다. 그런데 쉴 수 없다. 쉬는 순간 무한한 경쟁자가 제 몫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플랫폼 노동에서 평판 관리는 노무 관리의 핵심이며, 한 두 개의 플랫폼이 시장에서 독점적 입지를 강화할수록 플랫폼의 노동자 지배력을 더욱 커진다. 동시에 그런 지배적 플랫폼 안에서 평판 관리는 노동자 내면의 욕망도 부추긴다. 대규모 시장 안에서 평판만 잘 관리하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안겨준다.


지난 세기 동안 나타난 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늘 인간의 불안을 드높였다. 기술 격변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우려와 달리 노동자는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문제는 어느 시점부터 질도 낮고, 보상도 낮은 일자리로 유휴노동력이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동시간이 큰 폭으로 짧아지면서 고용이 유지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플랫폼 시대의 크로노토프가 누구에 의해 쓰이는 지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노동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람들이 쓰는 크로노토프는 자기 주체적 서사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가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회전체의 크로노토프는 특정자본가가 주체가 된다. 사회 보장은 사회계약이었고 그것은 근로계약을 근간으로 했다. 그렇다면 국가 권력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디링제는 법제적 대안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플랫폼 노동자에게 임노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다른 하나는 통합적인 일반노동법을 구성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모르겠으나 한국의 경우 임노동자와 유사한 사회권을 플랫폼 노동자에게 인정하는 것은 아직은 실효성이 낮아 보인다. 노동조건에 순응해버리면 임노동자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산재보상법 개정 이후 개별 배달원이 산재 적용을 받도록 수정되었지만 보험료의 절반을 자부담해야하는 등 장벽으로 인해 실제 가입률은 형편없이 낮은 것이한 예이다. 그냥 안 하고 마는 것이다. 디링제 역시 노동자성 여부에 상관없는 일반노동법에 더 힘을싣지만 이것도 실효성이 있을 지 미지수다. 새로운 특수법의 입법이 늘 마법의 탄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속도’다. 이들 법이 위키피디아가 아닌 이상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일종의 위키라면 당면한 문제에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시민사회는 독일 금속노조에서 만든 대안 플랫폼인 Faircrowd.Work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플랫폼 노동자들을 위한 플랫폼이다. 열 두 개의 대표적인 플랫폼을 리뷰하고 있다. 해당 사업체의 약관에 노동권 침해 요소가 있는지 ‘좋아요’로 보여주고, 실제 노동자는 플랫폼을 ‘별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플랫폼 시대에 플랫폼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국가는 공적 플랫폼의 도입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형 알파고’가 농담취급 받는 현실에서 시장주의자들의 거센 반발과 냉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랫폼이 21세기에 부활한 노동중개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적 플랫폼으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지는 플랫폼과 경쟁하는 방안도 열어두어야 한다.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노동은 시장에 진입하기 전 일시적인 시기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한시적’이라는 단어는 ‘영구적’과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그 결과 사회보장과 소득보장의 권리는 일상에서 지워진다. 휘황찬란한 기술의 향연에 쉽게 압도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오래된 미래임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의 노동 중개상들은 디지털로 무장하고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다. 달라진 속도 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 플랫폼 노동자에게 사회는 무감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가늠자가 될 지도 모른다.


  1.  국어사전에서 플랫폼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으로 정의함. 즉 승강장, 정거장을 뜻함. 기술의 발달을 통해 플랫폼이란 뜻도 다양해짐. 원래 플랫폼은 ‘plat(경계를 정한 공간)’과 ‘form(형태)’의 합성어이다. 즉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함. 최근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플랫폼의 의미는 ‘인터넷 정거장’임. ‘스마트 시대’에서 인터넷 사업자·콘텐츠 제공자·고객 등 다양한 주체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가 바로 플랫폼. (참고: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23159) [본문으로]
  2. 우버는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서비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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